- [FP-1YCS] Tour du Monde 신규속지 Review 뚜르 드 몽드 속지를 프리뷰한게 엊그제같은데, 어느덧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녀석을 발견하였다. 데일리 1년치를 모아 놓은 분량 답게, 상당히 두꺼운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2009-12-17 23:20:36
이 글은 Bebop830님의 2009년 12월 17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이 글은 Bebop830님의 2009년 12월 17일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뚜르 드 몽드 속지를 프리뷰한게 엊그제같은데, 어느덧 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녀석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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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 1년치를 모아 놓은 분량 답게, 상당히 두꺼운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프랭클린 플래너 속지들보다는 두껍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저걸 1년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은 지워지질 않았다.
그러나 두께보다는 내용물이 중요한 법~!! 비록 스타터 에디션이 아닌지라 이것저것 다양한 구성품을 기대할 수는 없고, 플래너야 뭐 다 거기서 거기인 구성을 가지는 만큼 새로운 구성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 제품을 까 보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음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일단 가장 중요한 표지, monthly, 그리고 daily를 살펴보았다.

뭐....그냥 평범한 구성이라 디테일하게 살펴보지는 않겠다.
monthly의 경우에는 세로로 펴져 있어서 플래너를 넘나들면서 90도 꺽는 일은 없다. 물론 여타 대부분의 플래너 에디션의 경우에는 이와 같이 되어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기존에 '플래너 포 크리스찬' 버전을 썼는데, 가로로 monthly가 배치되어 있는 바람에 플래너를 요리조리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이참에 크리스찬 버전을 한번 보자.

음... 텅 빈 일정이 부끄러워서 빈 걸로 쓰고 싶지만, 이번 달이 12월인 관계로 어쩔 수 없이 그냥 찍어보았다. 다른 분들은 생소하시겠지만, 필자와 같은 경우에는 크리스찬 에디션과 같은 가로배열을 시작으로 플래너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게 친숙하고 뚜르 드 몽드의 세로배열이 신선했다.
자아~ 다시 돌아와서, 눈썰미가 좋으신 분들은, 이번 판에서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여행지 스케치'의 삽입인 것을 눈치채셨을 것이다. 주로 monthly나 daily의 오른쪽 윗부분에 자리하는데, 위에는 두가지 다 동일한 그림이 삽입되어 있어서, 설마 이 그림으로 365일 울궈먹진 않으려나 하는 불안감이 생기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리하야, monthly 12개월을 짜맞추어서 그림들을 한번 나열해 보았다.

음... 좀 길긴 하지만, 사실, 뚜르 드 몽드에서 이게 볼게 다이므로 그냥 대충 이런 그림이구나~ 하고 넘어가시면 될 거 같다.

자, 다음은, 여타 스타터 에디션에 많이 있는 바로, 그, -사명선언서- 파트이다. 본인이 크리스찬 버전에서 쓸 때에는 이런건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스타터 에디션보다는 간소하게나마 실어놓았다. 행여나 바인더만 사고 이런 파트를 접하지 않았다면 뚜르 드 몽드에서 제공하는 이 파트만으로도 플래너 생활을 수립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만 조금 차이가 있다면, 기존의 사명선언서 파트는 가치->역할->찬사->평가.......->사명서 등의 7단계를 거치며 이전 단계들이 마지막 단계인 사명선언서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지만, 여기에서는 가치->사명->자기의 삶을 주도하라->쇄신의 4 단계로서 각 단계마다 비중이 고르게 되어 있고, 사명서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라기보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 위해 효과적인 일정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데에 가깝다.
물론 기존의 사명서 작성 7단계도 이러한 역할을 하지만, 뚜르 드 몽드의 4단계에 비해서 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보다는 사명서의 밑바탕을 이룬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뚜르 드 몽드가 조금 새로운 시도를 시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밑바탕에는 4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자기 쇄신'의 영향이 컸다.
조금 더 궁금하다면 직접 사 보시라.
그런데 죠큼 당황했던 것은, 이러한 파트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단계들이 데일리의 월 단위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2월 데일리 마지막에 '플래너 사용법'이라는 파트가 있었지만, 이 뒤에 3월 데일리가 분포되어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설마, 플래너 사용법을 2월이 지난 다음에 보라는 뜻은 아닐테고... 지난 달에서 다음 달로 넘어가는 경계마다 이 구성원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본다면 공정상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의도는 모르지만, 다음 배포판에서는 재배치를 해야 할 것 같다.
다음은 마지막으로... monthly와 daily말고 또 무슨 구성품이 있을까???
크리스찬 버전에서는 프리노트, 가계부, 목표설정 등의 자잘한 구성이 있었지만, 뚜르드 몽드는 '쿨하게도' 이런 자잘한 구성은 별로 없다. 그렇다면 한번 까 보자.

특이하게도, 뚜르 드 몽드에서는 다음해인 2011년의 monthly 12개월치와 2012년부터 2015년까지의 간단한 계획 기입 사항을 마련해 놓았다. 1년을 1쪽에 몰아 넣어서 간단하게 표기할 정도의 공간이라면 이해가 갔지만, 2011년의 monthly를 통째로 제공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일반적으로 2010년 12월 달 정도의 시점에서 2011년 1월 내지는 2월이 필요하겠지만, 2011년 12월까지의 monthly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필요한데 없는 것보다는, 비록 필요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지라도 소수의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러한 monthly를 제공한 것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은 된다.
지금까지 뚜르 드 몽드의 속지 리뷰를 살펴보았다.
프랭클린 플래너의 여타 속지들을 접하신 분들은, 변함없는 구성에 '역시나'를 머릿속에 떠올리시겠지만, 플래너의 구성 자체가 프랭클린 플래너 고유의 플래닝 방식에 최적화된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행'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스케치' 디자인을 활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여백의 미를 살렸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고 싶다. 프리뷰 때에도 언급하였지만, 흰색 계열로 디자인한다면 조금은 허한 느낌을 많이 줄 수 있는데, 스케치 디자인을 가짐으로써 그러한 느낌을 최소화 하였고, 오히려 군데군데의 여백들을 사용자가 자기 입맛에 꾸밀 수 있도록 남겨두었다. 그냥, 조금 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하는게 솔직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스타터 에디션을 장만한 적이 없는 사용자라면, 뚜르드 몽드의 플래너 활용 4단계를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일반적인 플래너라면 월간, 일간만 있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서는 플래너 활용 4단계를 통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2010년을 보낼 것인지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으로 본 리뷰를 마칠까 한다 ㄲㄲㄲ 어서 낼롬 지르시길~
ps. 뒤져모니 이러한 스티커도 동봉되어 있었다.

이 글은 Bebop830님의 2009년 12월 5일에서 2009년 12월 6일까지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사진 저작권과 뉴스 저작권 문제로, 뉴스 딥링크를 하지 않고 구글 검색결과로 대신합니다.)
어느 모습이 더 나은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채 단순히 집무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찍은 홍보사진과, 이것저것 바쁜데 홍보차 오니, 최소한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정리를 하고 찍은 사진 중에서 후자가 마음에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저도 대낮에 폭격을 맞은 것처럼 책상이 너저분하거든요. ㅋ. 교수님이 지나실때마다 한숨쉬고 가시곤 합니다.
그런데 잠깐, 사진을 자세히 보면, 뭐 그다지 어지럽혀 있지도 않네요. 이래서야 저의 말에 설득력이 없는데.... 아, 강력한 동지를 만났습니다~!!
이분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사진입니다. 환경문제를 담은 '불편한 진실'의 책을 내면서 일찌기 환경운동가로서의 명성도 자자하시죠. 한 컴퓨터에 모니터 세개를 연결하는 모습과 함께,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서류, 책, 잡지 등등의 사진은 저와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든답니다.
또 하나의 동지를 소개해 드리죠. 위의 대통령 비교사진과 함께, 아인슈타인의 말이 함께 덧붙여지며 사이트를 오가는데요. 진위여부가 궁금해서 한번 구글링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유명 사진단체인 LIFE의 이 리뷰가 나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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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ssy desk of Albert Einstein (1955)
22Nov08
Stacks of papers, envelopes and a half to write formulas. These images of Albert Einstein’s desk in his office at Princeton were published by Life magazine in 1955, just months before his death. They can contemplate a blackboard full of equations, a pile of old magazines and even his own pipe momentarily abandoned on one of the notebooks.
We can see, what looks like a dress, some books, a copy of a journal of philosophy and even a glass ashtray. Under the piles of papers were lost atisban pens and unopened letters, documents that might contain the key to the unified theory, which invested unsuccessfully in recent years of his life. At the center of the picture there is a photo of what looks like a square, not people. What Einstein was thinking minutes before it reached the photographer?
On th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having a messy desk authentic treaties have been written, some of whom argue that chaos can be more productive than an order too strict. However, nothing like the quote attributed to Einstein himself supposed to put things in place:
“If a cluttered desk is a sign of a cluttered mind, then what are we to think of an empty de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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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같이 떠돌던 글귀는 바로 '어지러운 책상이 어지러운 정신을 반영한다면, 비어있는 책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였습니다. 물론, 이 말은 어지러운 책상에 대한 반대어가 '정리된 책상'임을 생각한다면, 그저 어폐있는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어지러움을 타파하자는 것이 1YCS, 프랭클린 플래너의 모토니까요.
그러나 저는 가끔은 어지러운 삶을 사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리된다는 것에 대해서 압박을 느끼기 시작하면 정작 무엇을 위한 정리인지조차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로는 정리된 상태에서보다, 난잡한 상태에서 여기저기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이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ps.물론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어지러운 책상을 가졌다고 모두 아인슈타인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지러운 책상을 가진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는 어디에 뭐있고 뭐있고 꿰차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최소한의 방향성을 유지한 채 일을 집중한다면, 책상이 얼마나 잘 정리되어있느냐의 여부는 일의 성과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디자인의 플래너 속지를 발매하면서 플래너 사용자들의 입맛을 다양하게 만든(?) 프랭클린 플래너 社가 이번 겨울에도 새로운 디자인의 속지를 발매하였다.
그거슨 이름하야 '뚜르 드 몽드'라고 하는데, 대략 '르'에서 굴려주고 '드'에서 약하게 발음을 넣다가 '몽'에서 아스트랄하게 혀를 뒤로 제끼며 발음해주면 그대도 프랑스인 뺨치는 발음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필자는 불어라고는 '봉쥬르'밖에 모른다.
일단 표지부터 까보자.

Tour라는 철자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번에는 '여행'을 테마로 정한 것 같다. 세계 각지의 여행정보를 담았으면....좋겠지만, 플래너 본연의 기능에서 벗아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그냥 속지에 유명 여행지의 스케치를 담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표지는 여행의 대명사인 '세계지도'를 담았는데, 식상하게 그냥 지도를 갖다 박는 것이 아니라 스케치 느낌의 그림과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깔 채색으로 포근한 인상을 주었다.

다음은 월간이다. 여느 플래너와 마찬가지로 2페이지에 걸친 구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의 경우는 현재 크리스찬 버전을 쓰고 있는데, 세로형이 아니라, 90도 돌려서 보는 가로형이기 때문에 조금은 생소하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표지에서 세계지도그림을 보고 대략 짐작을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하얀 바탕에 짤막짤막한 스케치를 덧입힌 디자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깨끗하고 산뜻한 느낌을 주고 있다. 자칫하면 이러한 디자인은 공허한 느낌을 줄 수 있는데, 그래도 여행이라는 컨셉이 이를 잘 살려주고 있는 것 같아서 2% 부족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꾸미기 좋아하는 여성분들은 여기저기 데코할 거리가 많아서 선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일간인데....월간에서 보았던 그림이 여기 또 나왔다고 해서, 모든 페이지가 이 그림으로 통일되지는 않았으니 안심하라는 말을 먼저 꺼낸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각국의 다양한 여행지들을 담았다고 하니, 날마다 새로운 스케치를 보면서 잠깐동안은 여행의 기분에 빠져드는 즐거움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뿐만 아니라, 타 버전과 같은 경우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명언들을 담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에서는 테마에 맞게 여행에 관련된 짤막한 말들을 매일마다 한토막씩 달아놓았다. 샘플에 기재된 말은,
'삶이 그대를 힘들게 하는가. 그렇다면 떠나라.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와 다시 시작하라.'
이다. 뭔가 매일 '성공해야 한다.', '주도적이어야 한다.' 등등의 말에 지쳤다면, 금년에는 이 속지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무언가에 미치도록 집중해야 할 때가 있지만, 또한 무언가에 잠깐 정신을 팔면서(?) 색다른 경험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비록 삶에 쫓기면서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아쉬움에 쩔어 살지만, 플래너라도 이 속지로 바꾸면서 매일마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산다면 이것 또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흠냐, 작년까지만 해도 프랭클린 플래너 쓰는 사람들을 보면 '겉멋들어가지고...수첩쓰면 되지'라는 생각을 하던 내가, 사명선언서 워크샵을 접하면서 금년 1월 4일에 처음으로 리필 속지를 구매했다.
사실 울 학교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재작년 총학생회장 공약이 프랭클린 플래너 CEO 사이즈 바인더와 속지를 개인당 1개씩 배포하겠다는 것이어서, 선출된 뒤 무료로 받으면서 접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플래너 사용설명서에 씌여진 말들이 워낙 공격젹(?)이라 많은 거부감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뭐, 지금은 여러 특강들을 통해서 하도 들어서 익숙해졌지만, 물 흐르듯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기에 편했던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라'는 말이 어색함을 넘어서 무서웠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바인더와 속지를 방치해 두다가 작년에, 울 교회에서 진행하는 훈련 프로그램인 Sarang Leadership Academy (줄여서 SLA)에서 훈련 받으면서 삶의 핵심가치도 설정하고 사명선언서도 만들고 등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내가 삶을 살면서 가지고 가야 할 나침반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나침반을 토대로 나만의 삶의 '지도'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나는 플래너 샵에서 체크카드를 긁었다.
생각외로 플래너 속지에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서 여러가지 '디자인'이 있었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르겟다. 순정판(?)인 'Original', 컬레지엇, 리더스 등등의 이름들이 있길래, 일일 다이어리가 거기에 특화된 줄 알았더니, 구성품의 차이가 약간씩 다를 뿐, 일일, 주간, 월별의 구성은 대동소이하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보기 좋은 거대로 입맛에 따라 고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눈에 띈 것이 바로 Franklin Planner for Christian버전이었다. 일단, 내가 속지를 고른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1. 특화된 기능이 있으며, 나의 필요에 맞을 것.
2. 편집 가능할 것 (트윈링이 아닌 바인더류)
3. 가능하면 1day 1page형식일 것. (이는 휴대성을 위함이었다. 어차피 daily track은 쓰지 않는다)
4. 처음 시작이니 식상한 original은 피할 것. (어차피 튜닝의 끝은 순정이다. 기왕에 다른 경험을 하자.)
이러한 기준들에 1번 기준을 만족시킨 것이 바로 이 크리스찬 버전이다. daily구성은 우선순위와 time track은 다른 속지류들과 동일하나, 윗쪽에 '말씀묵상'파트가 있고 주일마다 설교말씀을 적는 칸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monthly에 내 주윗사람들의 기도제목을 적을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원했던 기능이었다.
내가 물건을 살 때, 기능성 다음으로 가장 중요시하는게 휴대성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산다고 하면, 필요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측면에서 다기능을 가진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이 속지에서도 플래너의 기능 뿐만 아니라 묵상집, 기도노트의 역할을 겸할 수 있고, 내가 뭐 그리 신앙이 깊은 편이 아닌지라 영성에 관련된 기능이 그렇게 비중이 높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이정도면 충분하다'선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 플래너를 고른 영향이 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이걸 어떻게 습관을 들여야 하는것이냔 말이지...
내일 면접인 관계로 긴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주 설교 어떠셨나요?
지난 대예배 6부에 오정현 목사님이 언급하신 [사랑의교회에 대하여 악담하는 내용을 담은 '네이버 블로그']입니다.
http://blog.naver.com/junghoonyoo
어느 입장이 진실인지는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p.s. 사랑의 교회 신축되기 전에 저는 반드시 이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p.s. 과한 표현 죄송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3과 학습하셔서 알겠지만,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지만, 성도'가' 교회의 몸입니다.
기독교의 '순종'을, 로마시대부터의 정치가들 뿐만 아니라 목사(님)들조차 똑같이 이용하는 것에 대해서 이제는 더이상 견디기 어렵습니다.
오랜만의 글을 밤새 쓴 터라, 글도 엉망이고, 날카로운 표현(한마디로 똥매너의)들이 많지만, 부족한 지체에게 아량을 베풀어 주신다 생각하시고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밤새 쓴 저는 오죽하겠어요 ㅋㅋㅋㅋ
원래는 생각을 정리하고 하나의 글을 작성하려 하였으나,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서고, 괜히 변호사이신 블로그 주인에게 누가 될까봐, 그냥 저의 재량 선에서 답변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로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바쁜 상황속에 있는지라, 제가 올린 글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친 상태에서 제가 쓴 글들을 살펴보았는데, 현 목사님에 대해서 너무 비판적인 표현을 많이 한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제 아무리, 이런 표현들을 목사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포장해 봤자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하고, 설득력이 떨어짐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현재 무언가 너무도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한 위기감 때문에 그렇다는 점을 (염치 불구하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분명 어린양 주제에 목자 욕하면 제 얼굴에 침뱉기임을 압니다만, 이제까지의 참았던 감정을 절제하는데 조금은 미숙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난 주일날 교회를 가는 와중에, 예전에 오목사님께서, '요즘 젊은 목회자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기성교회들을 너무 비판한다'던 설교말씀이 계속 제 귀를 맴돌았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저건 분명 옳은 말씀만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사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지난 대예배 말씀에 대한 반감이 증폭된 걸수도 있습니다. 대예배 시간동안에도. '저건 아니야....'하고 고개를 설레설레했는데, 월요일인가 화요일에 아는 청년부 형님이 목사님이 6부 예배때 네이버 블로그 언급한 얘길 듣고 꼭지 돌았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제가 이렇게 일을 벌려 놓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4시 40분쯤에 진호도 글을 올렸군요. 논문 마감에 쫓기고 체력의 한계도 있어서 지금껏 미루다가 한창부터 글을 썼는데, 먼저 탁월한 필체의 글을 올려버리니, 괜히 비교도 되고 별로 썩 좋지 않은 제 글이 쪽팔려서 지워버릴까 5초간 생각은 했는데, 그냥 쓴게 아까워서라도 올려야겟네요.
아무튼, 미천한 저의 글에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아주신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리플 중에서는 저의 어투에 동조하신 분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저를 마귀나 사단으로 몰아가지 않으신 것에 대해서 저는 감개무량하게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진심으로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는 물러갑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문제의 블로그 중 건축에 관련된 글 7개를 갈무리한 오피스 워드20007파일과, 옥한흠 목사님의 Disciple지 11월호 인터뷰 PDF를 첨부합니다.
가능하면 워드파일을 인쇄해서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200쪽이 넘어가는 분량이라 감히 권하지는 못하고, 옥한흠 목사님 인터뷰라도 읽어보시길 강력하게 권합니다.
[권신영님]
원론적인 말일지는 모르지만 과연 비판거리를 찾고 그러한 증거들을 찾는 시간만큼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교회를 위해 '기도'를 해보았는지 궁금하네요. 교회에 대한 주인의식은 세상과 같은 방법으로 소통할수 없는 '비판'을 하는 것 보다 다른 방법으로 '기도'를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제생각에 저런 블로그를 통한 글의 게시는 상황을 지양하는 것 보다는 악화시키기가 더 쉽지요. 특히나 교회 안의 분열은 사단이 가장 공격하기 쉬운 방법중 하나입니다. 저 또한 전에 그런 경험이 있었구요. 진정으로 '기도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는 성도라면 좀 더 성숙한 방법으로 대처 함이 필요할듯 합니다.
=> 간사님으로서의 공동체와 영적 전쟁에 관한 통찰력, 저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렇게 밤새가며 블로그글을 읽고 각 리플마다 답변을 달은 만큼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지 못한 면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절차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거망동한 것 같아서 사실, 하나님 뵈기도 만망합니다. 제 아무리 건축에 대하여 회의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러나 최소한의 기도(사실 영성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푸념에 가까운 소리를 하지만)를 동반하면서 행동, 즉 비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의 무수한 리플에 대한 답변에서처럼, 기도를 한 뒤에 그 마음에 입각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지, 기도가 전부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건축에 관한 기도를 하면서 더욱 더 위기의식을 느꼈고, 왜 내가 이런 의식을 느껴야 하는지조차 하나님께 야속한 마음이 들 정도였습니다.
신영형님께서 교회의 분열은 사단의 주요 공격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사실 그보다 훨씬 간편한 방법은 그 교회의 목자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 교회를 비롯한 무수한 교회, 특히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그러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 그 공격에 넘어가셨는지는 하나님이 아시겠지요.
교회 비판에 관한 입장에 앞서, <빙하가 녹고 있다고?>를 저술한 존 코터 교수의 <위기감을 높여라>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본능에 의하여 수많은 기업의 구성원들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으며, 더욱 심각한 것은 자기들이 그러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것을 모른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제 아무리 성공적인 성장을 이룬 뒤에도 끊임없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의식은 단지 경영진이나 임원진들이 주로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전 사원 모두가 느끼도록 해야 하며, 어느 위치에 있는 사원이라도 자기가 기업에 대한 위기감이 느껴진다면 언제라도 임원진 쪽에 이야기할 수 있음으로써 기업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에 등장하는 부류 중에 두가지는 'Nonos'와 '회의주의자'입니다. 두 부류 다 <빙하가 녹고 있다고?>에 등장하며, 각기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회의주의자'는 자기에게 닥친 변화에 대해서 먼저 대처하기보다는 일단 의심을 하며, 그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회의주의자를 설득하여 그에게 납득시키기 전까지는 회의주의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회의주의자에게 위기감이 도래했다고 답득이 되면, 누구에게도 못지 않게 행동을 하며, 열의를 보입니다. 한편, 노노스는 위기에 대하여 쉽사리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회의주의자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회의주의자는 일단 변화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으면 입장을 바꿀 수 있는 한편, 노노스는 '악의적으로' 이러한 위기감에 대하여 묵살하고 비아냥거립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노노스들은 수완과 말빨이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본적인 직무 능력도 뛰어난 편이고, 주윗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윗사람 입장에서는 골치이지요. 까딱하다가는, 노노스가 주변 사람들을 설득해버려서, 정작 위기 상황에서 윗사람이 이들을 통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요.
얼핏 생각한다면, 오정현 목사님이 윗사람이고, 저나 네이버 블로그 주인이 노노스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교회 옮긴다는 변화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고(정확이 말하자면 '절차상의 문제점'에 대해서 대단히 우려하고 있다는 것에 가깝지만) 그럴듯한 이유를 대가면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진정한 노노스가 누구인지 정말 이제는 저로서는 더이상 말하기 지칩니다. 누가 정말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누가 정말 자신의 안정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노스적인 행동을 하는지는, 이제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이런 말해서 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제 사랑의 교회에 대하여 더이상의 미련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여기에서 받아왔던 은혜들이 너무나도 컸기에, 이렇게 장시간을 들여가면서 키보드를 두들겨가며 이공계 전공자로서 되먹지 않은 글을 써가며 저의 의견을 표출하고자 합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는 (뻔하고 진부한 말이지만)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저도 기도하면서 얻은 신념이 있고, 그것을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싶습니다.
언젠가부턴가, 대학부가 공장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는 듯하면 나가고, 리더로 세워지거나 대학부가 돌아가는 모습, 대예베에서 행해지는 모습들이 정형화되어가면서, 내가 믿음이 부족해지거나 은혜가 없어서 그런가 하고 되뇌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렇게 저의 소신을 리더커뮤니티에 남깁니다. 전통적으로 저의 글이 일부 지체들에게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 못할까봐 대학4부클럽에는 차마 올리지 않고, 계속하여 리더커뮤니티에 올려왔습니다. 뭐 관심가져주시는 분들은 감사하고, 그렇지 않으신 분들에게는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한명이라도 선한 영향력을 일으킬 수 있는 도화선이 된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제까지 저의 답변글들을 보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언제라도 다른 답변글은 환영이며, 이렇게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음을 확인하고, 인간의 불완전한 시각에서 조금이나마 넓혀나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재훈님]
다들 혼란스러워 하지만 지금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있어야 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는 듯 하니 언급 안할게~!!
조심스럽지만 필요한 고민들인것 같아... 건강할지도 모르지(건강하려 애쓰는 것 일지도).... 건축관련해서도 교회 안에서 문제제기하고 해결해 나갈 방법이 있으면 좋을텐데 (웹상에서 소리가 커지는건 상당히 위험해) 교회가 건축관련해 솔직히 너무 닫혀있는건 사실이니까.. 많은 그리고 민감한 사항인 만큼 담임목사님과 리더십들의 조금 더 열리고 신중한 태도가 필요한건 누가뭐래도 사실이고.. 많은 대학,청년,장년 성도들이 많은 하고싶은 이야기들을 외부가 아닌 안에서 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교회 차원에서 만들어 준다면 참 좋을텐데 말이야.. 새생명축제 저녁에 있었던 설명 이상의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거 같아..
무서운 세상이야.. 왠만한 정보와 의견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알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거든... 똑바로 전해지든 왜곡되든지... 블로그와 트위터.. 유용하지만 무섭다.. 그만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은 더욱 신중해야 할듯해...
아~ 어려운세상
- 리더클럽에도 조심스러워 중립적인 의견도 미니홈에밖에 못쓰는 1人
=> 맞아요. 사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데, 교회 게시판에 이러한 우려를 나타내면 은혜가 오가야 하는 교회 게시판에서 이런 글은 은혜가 안된다며 즉시 삭제가 된다느 이야기를 듣고(진위여부는 모르지만) 적잖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블로그라도 사람들의 우려의 배출구가 되었는데, 오정현 목사님께서는 건전한 대화를 요청하시기는 커녕 '사랑의 교회에 악담하는 네이버 블로그가 있다'며 '거기가서 반박'하라고 주문하실 정도면 정말로 마음이 찢어집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그러한 과정을 지켜보기가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저는 오히려 웹이 교회의 프로파젠다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서 환영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여기 공간마저도 건드릴까봐 우려하고 있는 입장이네요 ^-^)a;;
분명 웹이 파급력이 크기 때문에 control 불가능한 여파가 미칠 가능성도 있지만, 정보를 통제하는 입장의 권력층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다는 크나큰 장점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일부 바람잡이들의 거짓된 정보는 가려내야 할 통찰력을 길러두어야 하겠지요. 분명 재훈형님 말씀대로 크리스천들이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정보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보가 웹에서 나오든, 교회에서 나오든 말이지요.
비록 본인이 소심하다면서 미니홈피에서도 중립적인 의견밖에 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지만, 형님의 귀중한 댓글은 저에게 단비와 같습니다. 이거 마치 관심가져달라고 구걸하는 기분이네요 ㅋㅋㅋㅋㅋㅋ
[김민규님]
근데 저는 동한이가 올려놓은 블로그에 실려있는 글 보면서 여러가지 의견이 난무한데
그냥 드는 생각은 이게 하나님의 뜻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건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건 없다고 생각되네요..
기도하면서 어떻게든 지어질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우리끼리 이러네 저러네 해봤자 다 소용없는거 같아요..
물론.. 그게 싫어서 교회를 떠난다면야.. 어쩔수 없지만.. 저는 교회건축에 찬성하는 입장으로서
교회가 새로 지어진 다음을 위해서 기도할까 합니다.
물론.. 함께 가고자 하는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었는데..ㅎ
=> 맞아요. 분명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은 한정되어 있고, 기도로써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촉매의 역할을 하시지, 반응물질(화학도라..이런 표현 죄송합니다)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다양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셨지만, 천지창조의 시점을 제외하고는 항상 선지자나 일반인과 같은 인간을 도구로 쓰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희가 기도하고 주님께 온전히 맡겨버리는 것은, 다른 한 편으로는 무책임한 행동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청년들이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하셨지, 골방에서 나오지 말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기도는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기도가 전부여서는 안됩니다.
분명 오정현목사님께서 굳게 마음을 먹으신 만큼, 그분의 생각을 쉽게 돌이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저희들은 저희들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간다고 느꼈을 때, 하물며 교회 내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하면, 어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마저도 적당히 타협하다가는 목사님의 설교 소잿거리가 될 것 같아 두려워서라도 저는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에 대해서 찬성하시는 입장으로서, 교회가 지어진 뒤를 위하여 기도하신다면, 저로서도 드릴 말씀은 없지요. 그러나,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교회가 지어지는 와중에서도 오정현 목사님께서 올바른 사명을 가지고 건축하시길 중보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영훈님]
동한이 말대로 글의 표현이 조금 과격한면이 없진않지만
어쩌면 그것 또한 이 교회를 향한 동한이의 뜨거운 사랑의 한 표현이겠지?^^
동한이에게 김남준 목사님의 '교회의 질서와 하나님의 통치'라는 설교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하고싶네
http://www.yullin.org/Sermon/BibleClassView.aspx?sid=403
위에 링크 통해 들어가면 볼수 있을거야~
성도의 주인의식이나 절차적 당위성의 문제에 있어서 좀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될수 있을거라 기대한다^^
=> 와아아, 귀중한 설교 감사드립니다.
저도 답변글을 쓰기 이전에, 대학부+청년부+기드온 집회 동영상과 이 설교동영상을 먼저 보고 싶었으나, 백만 실업자+졸업논문에 허덕이는 대학원생의 입장인지라, 일단은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미천한 글에도 불구하고 저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주신 점, 정말로 황송하고 고맙습니다.
꼭 권하신 설교를 빨리 접하고 조금 더 종합적인 의식을 가지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조정훈님]
개인적인 의견을 몇 자 적어봅니다.
아직 교회부지에 대한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으나 주인의식을 가진다는 말은 교회가 마치 국가의 소속물과 같은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와 교회를 둘러싼 지역사회도 중요하지요, 그런데 우리 교회가 지역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려면 주었지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려한다는 생각은 금시초문입니다. 지금 사랑의교회 교통문제는 강남지역이 발전하기 한참 전에 세워진 곳이라 이렇게 성정하면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었던 노릇입니다. 더욱이 서울지역이라면 똑같이 당면한 과제인데 우리 교회가 그것만을 해결하는 양 신축을 한다고 들은 바도 없습니다. 설교, 일반보도 기타등등, 그렇게 들은 적은 없는데 글쓴이(블로그)가 무슨 근거로 포장한다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순종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있으신 듯하나, 목사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동의를 구하고 실행하시는 것인데 정치가의 순종과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오목사님이 말씀하신 목자의 심정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사람들이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모든 일을 판단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교회이전 문제에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교만함이 들어갔더라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짐이겠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의 이전을 위해 고민하셨을 모두들(목사님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생각해보시면 어떨지 제안합니다.
(사족: 그런데 지난 주 옥목사님 영상에서 경제위기 시의 투자에 대한 예시는 조금 애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가적인 투자와 개인적 투자는 파급효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사족: 악플하는 사람의 이름과 동명인데, 어쩜 생각이 그리도 다른지)
=> 아, 제가 '주인의식'이라 했던 것은, 목자가 교회를 이끌고 평신도들이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사랑의 교회가 자기의 교회라 생각하고 책임감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용어로 '청지기의식'이라 생각하시는 것이 더욱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여기서도 옥한흠 목사님의 인터뷰를 빌리는 것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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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관심을 갖는 교회론은 어떤 영역이나 분야가 아니고,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즉, 교회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역
자인가 아니면 평신도인가? 저는 교회의 주체가 평신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고, 교회 주체인 평신도를 위해 목회자가 어떤 사
역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지, 성도들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신분과 소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목회자로서 어떻게 극대화시
켜줄 수 있는지 등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이 저의 교회론의 중심이 돼 버렸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의 중심사상이기도 합니다. 만인 제사장직이 바로 그것인데, 교회 주체가 평신도라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 일종의 기독교 민주주의가 나
오게 됐습니다. 최근 앨리스터 맥그래스가 쓴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에서도 지적을 했지만, 누구나 다 성경을 해
석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 민주주의인데, 전통적인 기성세대 지도자들에게는 위협적인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평신도를 깨운다거나 평신도 한 명 한 명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도성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통적인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에
게는 굉장히 위협적이고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입장에서는 강한 도전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부분을 성경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확신했고, 이것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신도를 중심으로 목회를 하다 보니 일반 목회와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전통 목회는 평신도가 동원(動員)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평신도를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주체, 동역(同役)의 대상으로 보았
습니다. 평신도를 교회의 실력을 대변하는 숫자나 부흥의 도구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좋고 열 사람도 좋았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설 때 이것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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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저의 통찰력의 한계로 이 문제애 대하여 잘 몰랐다가 블로그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는데, 조현준님께서 이에 대하여 의문을 품으셨군요.
쉽게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현재 사랑의 교회에 의해서 서초동 주변의 상권이 활성화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례로 식권을 통한 계약을 통하기도 하였고, 예배를 마친 교인들이 직접 음식점이나 까페에 가면서 관련 분야의 상권이 발달하였고, 기타 편의점 문구류, 그리고 교회공간의 협소함으로 인한 토즈와 같은 모임 공간도 활성화된 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옮기면 이것들은 다 초토화 되느냐?? 글쎄 냉정한 말이지만, 뭐 교회가 이것까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저로서도 없다고 조심스레 생각합니다.
문제가 뭐나면 신축 교회 주변의 상권입니다. 분명 음식점의 상권은 꽤나 왕성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상에서 보셨던 것처럼, 까페 공간이나 도서, 모임공간 등에서 교회 내에서 해결하거나 개방해 버리면 이와 관련된 상권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변수도 많고 상권에 대하여 악영향을 준다는 확실한 증거가 다른 문제들(교통이나 공간문제, 재정문제)에 비하여 미약하기 때문에 주요 반대요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문제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셔도 저는 할 말 없습니다.
그리고 교통문제는, 저 또한도, 신축 교회로 넘어가면서 저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거지, 이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것에서 드디어 벗어났다(표현이 이상하지만 어쨌든)는 표현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블로그에서의 입장은, 신축 부지로 옮겨도 교통대란의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는 못하고, 더더군다나 2500억원의 투자만큼의 효용성을 이끌어낼 수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순종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는 것은, '목사님께서 충분한 소통을 시도하시지 않은 채' 순종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분들에 대한 답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만약 목사님께서 충분히 대화를 하시고, 의견도 수렴하시고 결정한 일이라면 저도 별 말은 안합니다. 그러나, 이 부지문제는 갑자기 일사천리로 선정되며 부지 구매를 하였고 땅밟기를 하라고 시키다가 작정헌금까지 내라고 하는 형국입니다. 이는 적어도 대학부서나 청년부서, 다락방에서 무언가의 의견 소통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하는데, 너무나도 갑작스런 진행과정에 저는 어안이 벙벙한 것이지요.
분명히 말합니다. 의견의 최종 결정권은 목사님에게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내부 구성원들의 동의 혹은, 민주적인 의견수렴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전부에게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크지 않은 문제들의 경우는 장로님들이나 위원회를 구성하여 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이전의 문제는 교회 내부적으로 커다란 사건이며, 반드시 대부분의 구성원들(미성년자들은 제치고서라도)에게 동의를 구하야 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하다못해 투표라도 하던지요.
그리고 교회이전 문제에 조금이라도 교만함이 들어갔다면,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만, 조금 첨언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개인의 교만함이 들어갔다고 생각된다면, 이미 늦어져 버린 뒤에 그제서야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수동적인 생각이고, 오히려 그 이전에 우리가 올바른 방향을 모색한 뒤에 그러한 교만함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함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싹아지 없게 표현 한 것, 머리 굽혀 양해 부탁드립니다.)
(뱀발: 흐음..경제위기시의 투자문제라 함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교회들을 건축하고 성장한 케이스를 말씀하신 것인지요..? 저도 이에 대해서 뭐라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만, 국가적 투자와 개인적 투자를 연결짓기는 저로서도 이해하기 애매합니다. 조금 더 알고 계신다면, 조금 더 세심한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뱀발: 하하하, 그래서 하나님은 다양성의 선물을 주신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입장도 있어야, 더 나은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박재현님]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서는 순화된 표현 사용이 적절할듯 합니다. 제 경험상 아무리 좋은 '의견'일지라도 격한 표현을 쓴다면 설득력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성경과는 관계 없지만 제가 듣는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대책이 있는 행동은 용기지만 그렇지 못한 행동은 객기다. 용기는 일렬의 행동들이 모여서 빛을 발하는 것이지만 객기는 단편적인 행동이다'
형제님이 결단코 신축되기 전에 교회를 떠난다고 하셨는데, 영혼을 양육하는 리더로서
1) 그에 대한 대책은 세우셨는지,
2) 그리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교회의 몸'된 다른 리더들과 간사, 그리고 조원들 친구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런지 한번 더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목사님의 생각과 형제님의 생각이 100% 일치할 수는 절대 없겟지요. (저도 반년째 영어예배 참석중...) 아마 우리네 인생을 통틀어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은 크나큰 비극이겠지요. 하지만 우리 신앙의 삶의 최종목표가 '교회건축'도 '의견조율'이 아닌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고 그 분의 십자가를 통한 복음을 증거하는 삶일진데, 목사님의 말씀의 논리가 어쩌구 법이 어쩌구 '순종'을 강요한 교회의 부당성이 어쩌구...
다른 인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예수님에 비추어 볼 때 바른 사람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논란와 로직에 갇혀서 신앙적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겠지요.
그리고 한 마디 더. 떠날 때가 되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닌 사람이 그 이후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를 그렇게 보지 못했습니다. 교회건축의 명분과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합당함을 따지기 전에 저는 솔직히 앞으로 형제님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질지 걱정스럽습니다.
형제님이 어느 곳에 있는 어느 교회를 가던지 형제님의 신앙과 생각에 맞지 않은 것은 당연합니다. 교회와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오죽했으면 재법이가 미국에 갔겠습니까) 단지 형제님의 발언과 생각이 어느 순간에 만성화가 되어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까봐 염려스럽습니다. 지금보다 딱 세 걸음 뒤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두 걸음 뒤에서 교회를 바라보고, 한 걸음 뒤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결단코’ 자신이 무슨 행동을 취하겠다고 하신 것은 기억이 안나는 군요. 오히려 그 분은 결단코 하나님이 하라는대로 순종하신 것 밖에는...)
사실 아는것도 별로 없는데 이런 글 써서 죄송할 따름이며, 혹시라도 정 답답하면 제가 삼겹살이라도 사드리면서 얘기 들어드리겠습니다. 010-5107-5234 (소시짱)
=> 과함한 표현이 설득력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의견,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로서도 약간의 도발의 의도는 있었는데, 글 작성후 (소심한 A형인지라) 취소선을 그었지만, 오히려 생각보다 도발의 성격이 약함에 대하여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온당치 못한 방법인 것 반성하고 있으나, 저의 최소한의 감정 표현이었고 이렇게 해서라도 최대한 리더님들의 의견을 도출해 내고 싶은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두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변드리겠습니다.
먼저 '1) 교회를 떠난다는 것에 대한 대책은 세우셨는지'에 대해서는 저도 오래전부터 준비해왔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2004년 새돌때부터 대형화된 교회의 대학부에서의 피상적 인간 관계에 대하여 어느 정도 회의를 느꼈고, 2006년 3학년 중반기 이후부터 여러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과의 인간 관계가 멀어질 정도로 안좋은 상황을 겪으면서 사랑의 교회 이후의 다른 공동체에 대하여 이미 고민을 해왔습니다. 뭐, 저의 성격파탄이라거나 사회성 미숙의 문제라고 생각하신다면 저로서는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저로서는 다음 공동체에 대하여 계속하여 생각을 해 두었고, 지금까지 대학부에서 생활을 해오면서 '언제라도 떠날 마음의 준비'는 해놓은 상태입니다. 더군다나 리더를 내려놓은 지금 상황에서 걸릴 것이 없는 것이지요. 다만 제가 아직까지 떠나지 않은 이유는 그동안 제가 여러 리더들(리더서임 전 4텀, 쉬는 리더동안 3텀째)의 섬김과 교역자, 간사님들, 학년장, 그리고 대학부지체들의 은혜를 공급받았고, 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제가 섬길 수 있는 자리에 부족하게나마 남아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대학부에 대한 마지막 선물을 고려하고 있는데, 이건 삼겹살 뜯으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제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은 이렇고, 여타 지체들에 대한 영향으로서는, 오히려 제가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방향성을 상실한 채 단순히 '순종'이라는 단어 하나만을 좇는 것은 조원들에 대한 대단히 비모범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하고, 이에 대해서는 기도와 더불어서 행동력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간에는 불순종은 미덕이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편협된 시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 신부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는 그리스 정교, 성공회와 더불어서 천주교가 존재하였으며, 이에 반하는 것은 '불순종'이자 '파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마틴 루터 신부님은 천주교에서의 행동이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겠지만) 성경에 반한다고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불순종'을 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이 곧 기독교의 미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판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앞뒤 제쳐두고 오정현 목사님의 결정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다시 말해서 (물론 기도가 뒷받침된 상태에서) 본인의 생각에서 이러한 일들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설 때에는 그에 대한 대응적 행동을 조원들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리더의 본분입니다. 물론 교회에 속한 입장에서 리더가 소위 '반동적인' 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단순히 '반대'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있다'라면서 반대 입장을 표현하는 행동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정대로 건물이 지어지고, 본인이 더이상은 이 교회에서 내가 원하는 본질을 찾을 수 없고, 변화시킬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이상 혼란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떠나야 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떠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변화를 일으키려고 노력하였고, 지속적인 기도에도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더이상 상처받을 필요 없이 미련을 버려야 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2)의 질문에 대해서는 1)의 답변 후반부와 비슷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단순히 윗분들의 결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를 할 줄 아는 리더가 되는 것이 오히려 공동체 전체를 위한 길이 되는 것이고, 거꾸로 말하자면 단순히 교회가 움직이는 대로 수동적으로 흘러가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마을장님이나 간사님 급 정도 되면 체제 유지를 해야 한다는 대학부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더는 그동안의 제자훈련을 바탕으로 확립된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교회 내에서 'NoNos'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감을 느끼고 행동하는 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Nonos'와 '위기감'에 대해서는 권신영 간사님에 대한 답변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러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사회에 나가서도 그저 타협을 하게 되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교회가 비닐하우스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니까요.
하하하, '순종'을 강요한 어쩌구 저쩌구가 아마도 재현형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순종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단순히 이 일에서 빡돌아서 언급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에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에 순응하며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신다면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그러한 순종입니다. 그러나 일부 권력층들(물론 제가 언급한 '기독교를 최초로 국교로 인정한 로마를 포함한' 정치가들과, 정교일치를 표방한 암흑시대의 유럽 교황/왕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일부 목사님들)에 의해 이러한 순종은 단순히 '윗사람/목자의 결정에 복종하는 것'으로 와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교회 시스템에 대한 여러가지 이의 제기와 개선점들을 제기할 때마다 들려오는 '순종해야 한다'와 '기도해 보자'의 답변은 저로 하여금 지치게 만들었고, 더이상 교회를 나의 것이 아닌, 그저 내가 속한 곳으로 그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는 대학부도 예외가 아니고, 현 교역자에 그친 문제도 아닙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 시점에 이르러 점점 커져가는 문제점/위기감 속에서 그저 현 체제를 고집하고 점점 시스템이 고착화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저는 소속감마저도 잃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건축 문제가 거론 되었을 떄 폭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대학부야 워낙 변화무쌍안 상황이니 그렇다 쳐도, 교회의 보금자리문제마저도 (전문가 혹은, 여러 정보들의 회의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저 윗쪽에서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이니 따르라는 것은, 현 정권의 4대강 정책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발언 죄송합니다.)
다른 인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제가 주로 취하는 방법은,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저로서도 방금 언급하였듯이 '순종'에 대하여 막말을 했지만, 정말로 순종을 그렇게 이용했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느끼려 했습니다. 그래서 위의 문제의 블로그의 건축관련 글들과 답변들을 싸그리 인쇄하여 오늘 새벽동안 읽었습니다. 내일까지 논문 마감의 상황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어쨌거나 지금보다 늦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200쪽 넘어가는 분량을 읽었습니다. 이미 오정현 목사님께서 지난 예배 6부시간에 저 블로그 내용 반박하라고 (백기사가 되어달라는 표현을 하셨습니다.) 언급하였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블로그에 답변을 달았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내용을 기준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블로그 주인인 유정훈님과 다수의 네티즌들은 여러 자료와 실제적 상황을 토대로 우려를 나타내었고, 그에 대한 반박 리플들은 상대편이 막무가내로 건축을 반대하거나 심지어는 사단, 마귀의 단어를 사용해가며 자신들의 주장을 깍아내리는 행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개중에는 그래도 이미 시작한 일인데, 기도합시다라며 다독여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샛길로 빠지고자 합니다. (딴소리라며 눈살을 찌푸리시는 분은 , 그냥 제가 변명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시며 자연스레 다음 단락으로 너어가시면 되겠습니다.).
왕년에 정치인이자 환경운동에 영향력을 끼치는 '엘 고어'의 저서 중 하나인 <불편한 진실>을 읽어보셨는지요? 엘 고어는 어린 시절에 도시와 농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학교에서 수온 상승에 관하여 문제의식을 가진 교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인생을 환경 쪽으로 완전히 매진하게 된 사람입니다. 이 분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왔나교요?
불편한 진실이라는 책에서는 수십년간의 수온 상승, 홍수, 엘니뇨, 토네이도 등등의 이상기후의 증거들을 보이면서 이산화탄소에 의한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정치권에서는 이를 애써 외면하거나 과학계에서는 검증도 안되는 논리의 자료로 지구 온난화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이산화탄소 배출에 대한 규제가 미국 대다수 기업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언론들은 과학계에서 지구 온난화에 다하여 의심을 한 저널이 단 한 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논리와 샛길로 빠지는 언변을 통하여(262~265쪽) 마치 지구 온난화냐 아니냐를 놓고 과학계가 양분되는 것처럼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에 대하여 회의 느끼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하여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들, 심지어는 이미 망쳐버린 지구 까짓거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에서의 상황도 이와 다를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통의 문제요? 사랑의 교회에서는 이미 주차장, 주차타워, 각종 학교, 그리고 강남에서의 상권을 이용한 다양한 주차장들(일례로 교보문고에서 주간지 하나 사면 2시간 무료주차)들을 이용하여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있고, 그 외의 도보의 불편함을 돕기 위해 이미 2호선 강남역, 9호선 신논현역이 포진해 있고, 중앙차로의 수많은 버스 노선, 그리고 기타 빨간노선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서초동의 신축 부지는요? 거기는 서초역이 가깝다는 이유로 주차장 건설이 불투명하거나 적어도 지금의 주차공간보다는 적으면 적었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교육관 문제는요? 신축 부지는 건물 높이의 제한이 있기 때문에, 2000평에서 대예배, 주일학교, 대학부, 청년부 전부를 소화하지 못한다는게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벌 미니스트리 센터를 표방하면서 각국 인테리어를 본딴 공간까지 만든다고 하니 더더욱이나 공간의 부족이 여전함은 자명한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광고를 하였으니, 조금은 나아질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benefit이 과연 2500억의 투자가치가 있는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제 아무리 주님의 예배당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금전의 가치에 대해서 소홀히 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금전을 중요시 여긴 것에 대하여 노하셨지요. 이렇듯, 교회에서는 부지를 옮기는 것이 현 상태의 모든 상황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속담으로 따지면 '눈가리고 아웅'이라 할 수 있고, 정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로파젠다'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이미 땅을 샀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의견에 대해서는, 저는 거품을 물고 손사래를 칠 것입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라고 기도하고 땡이 아니라, 어떻게든 문제점을 직면하고 피해를 어떻게 최소화 할 것이냐에 대해서 고민을 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본다면 이것도, 문제점에 대해서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벌어진 일이라고 놔두면, 정말로 교회가 본질을 잃고 규모의 환상에 빠져, 더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때가서 후회하고 나오느니, 차리리 지금이라도 더욱 돌이키기 어려워지기 전에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떠날 때가 되어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닌 사람이 그 이후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단순히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교회를 쉽게 떠나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서도 자그마한 불만족 때문에 다시 떠나기 쉽죠. 저와 같은 경우에는, 이미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었고 다음 공동체로 예정한 곳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런 말을 여기서 해봤자 득이 되지는 않겠죠.
일단은, 제가 떠나겠다고 한 발언은 약간의 도발의 의도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제가 교회의 결정에 대해서 납득을 하지 목하겠다는 감정의 표현이고요. 어쨌거나 과한 표현이었음은 제가 계속하여 사죄를 드립니다. 그러나 사랑의 교회에서 소통이 부재된 채 계속하여 신축 부지의 결정을 밀고 나간다면 적어도 2012년 이전까지 제가 사랑의 교회에 남아있지 않을거라는 의향은 변치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오정현 목사님께서 지금 이대로의 마인드를 계속 가지고 계신다면 제가 신축된 사랑의 교회에 모습을 보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는, 제가 막무가내로 떠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서가 아니라, 교회에서의 본질이 이미 변질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교회의 핵심가치는 제자도입니다. 이러한 제자도는 제자훈련이 바탕이 되며, (재현형님이 오랜 대학부 생활을 통해서 아시겠지만,) 제자훈련의 규모가 적고 강력할 때에서 나오는 것이지, 규모가 커지면서 점점 '리더를 찍어내는 양상'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퇴색되고 점점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게 됩니다. (이는 대학부 디렉터인 백승준 목사님께서도 수차례 언급하신 적이 있으니, 욕먹을 각오하고 언급합니다.)
실제로도 옥한흠 목사님께서 이번 월 디사이플스지에 인터뷰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언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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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은퇴 후 저는 제 목회가 자체적으로 자기 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는 너무 비대해져 버리면 그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 목회가 교회론과
제자훈련이 엇박자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것은, 양이 많아져 버리면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확률이 그만큼 떨
어져 버리게 됩니다. 제가 은퇴할 때 사랑의교회가 주일 출석 장년 교인수 2만 3천명, 전체 등록 교인수 5만 명, 벌써 너무 커져 버렸습니다.
저의 교회론에 일치하는 목회를 위해서 적정 수준의 교회 사이즈를 유지했으면 싶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했느냐고 묻는다면, 인위적으로 교인수
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교회의 성격과 맞지 않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려서 최대한의 수확을 거두는 것은 영적 농사인 목회에도 그대로 적
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교회 사이즈를 획일화해서 성장을 억제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인이 2천 명이 넘어가면 제 교회론에 일치하지 않는 목회 즉, 잘못하면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지도자를 세워 독립시켜 사랑의교회와 같은 교회론을 가진 제2, 제3의 사랑의교회를 뿌리내리도록 했으면, 지금과 같이 실패했다는 감정을 갖지 않
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어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제자훈련의 선두주자로서 교회론으로 볼 때, 그 정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높아졌습니
다. 또 교회론의 본질에서도 위선자적인 입장에 빠질 수 있어 고민이 됩니다. 후임자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담임목사 한 사람이 아무리 조직
을 튼튼히 해서 자신과 같은 분신 부교역자 수 백명과 함께 사역을 한다고 해도 규모가 너무 비대해 버리면 한계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쭉
정이가 나올 수 있고 본질이 흐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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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도 그 '찍어낸' 리더 중에 한명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사랑의 교회의 일원으로써, 교회의 핵심가치인 제자도를 따르고자 주장할 자격은 쥐꼬리만큼이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뒤에서 '교회가 초대형화되어도 알찬 제자들이 나온다면 금상첨화'가 된다고는 언급하셨디만, 이러한 은혜가 지속될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으셨습니다.
뭐, 제가 옥목사님 인터뷰를 인용하고 '자 봐라'식으로 언급한다고 해서 옥목사님을 신봉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신축하여 규모를 늘려서 더 많은 역할을 해보자'는 입장과, 현재의 규모를 유지해서 제자도라는 교회 본래의 본질에 충실하자'는 입장 중, 후자가 더욱 사랑의 교회의 역할에 맞다는 생각은 떨칠 수가 없습니다.
형님 말대로 교회와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셨고, 이러한 의견들이 존중되어야 하지,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오목사님을 굳이 지칭하지는 않았음)에 의하여 교회가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확실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사랑의 교회 장로층이 이미 꼭두각시가 되었거나, 건축에 대하여 관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공동체이니 만큼 (기도하는 가운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축의 현황에 대하여 알 권리가 있고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이라면......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삿꾼들에게 한 행동들이 먼저 떠오를 뿐입니다. 예수님은 약자/순수한 어린아이에게는 한없는 포근함을 주셨지만, 본질을 벗어난 자들에게는 가차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삼겹살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ㅠ^
[권순일]
음~ 난 주일 설교 좋았는데.. 옥한흠 목사님 말씀에 갈팡질팡했던 마음에 오히려 확신이 들었음 ^^;
그래서 난 교회건축에 찬성 ^^ 블로그 가봤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드네 ^^;;
그리고 그 블로거 분이 예전에 옥한흠 목사님의 건축에 대한 입장을 언급한 부분도 있던데 이번 설교를 듣고 곧 글을 쓰시겠지? 뭐라고 쓰실지 조금 궁금~ 옥목사님께 실망했다고 할 수도;
나도 오늘이 면접인지라 ㅠㅠ (사실 조금 길게 글 썼다가 지움 ^^;)
다른 리더가 썼다고 해도 그렇겠지만 동한이가 쓴 글이기에 더욱더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네 ^^;
솔직히 건축에 대해 기도가 소홀했는데.. 정말 기도해야겠다 ㅠ ㅠ
가끔씩 우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김동한 리더 감사 ^^
하지만~ 표현이 과하긴 하다 ㅠ_ㅠ
같은 마을이지만 엇갈리는 바람에 같이 마을모임을 못해봐서 아쉽다 ㅡㅜ
오늘 면접 잘 보자 ^^
=> ㅋㅋ 그래도 옥한흠 목사님의 영상말씀에서 확신을 느꼈다니,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합니다.(진심입니다)
일단 영상 설교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은 오목사님의 압박/요청이 있었다거나 본의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현재로서 우리가 내막을 알 수가 없어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쪽을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일전에 인터뷰하신 디사이플스지와는 다른 입장을 표명하신 점에 대해서 동의를 하네요.
과한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순일형님에게 생각거리를 안겨드릴 수 있었다니 저로서는 황송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저의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함께 마음 모임을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저로서는 순일 형님이 3학년 때부터 꿋꿋하게 리더로서 대학부에서 섬기는 모습이 정말로 존경스럽고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면접 잘 보셨기를 잠시나마 기도합니다.
이 교회를 '반드시 떠나는 것'이 과연 '주인의식'인가 더 깊이 생각해보시는게 필요할듯 하네요.
어느정도 깊이있게 교회건축에 대해 고민해오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어느정도 우려스럽게 보고있는 사람 중 하나로서, 교회리더십 분들이 이 결정을 내릴때까지 거쳤던 과정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우리가 교회의 몸으로서 건축을 진정 걱정스럽게 생각한다면,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교회건축을 반대하신다는 마음을 강하게 주실 때 쯤에나 반대를 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깊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후에 하는 비판이 진정한 비판이될 수 있겠지요.
현재로서는 건축에 대해 너무 맹종적인 반응도 위험할 것 같고, 너무 마음과 귀를 닫고 반대하는 것도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번주 설교에 옥목사님까지 나서셔서 건축에 대한 말씀을 하시며 성도들과 소통을 하려 노력하신 부분, 오목사님도 몇주에 걸쳐서 조금씩 소통하시려 노력하는 모습들이 성도들에게 무조건적 '순종'을 요구하는 정도는 아닌듯 보이네요.
=> 그렇군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떠나버린다고 하면, 그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지 주인으로서의 행동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저도 동의합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만큼 제가 이 교회에서 기대하는 바가 컸고, 그것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과격한 표현을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실망한 부분은, 이러한 일련의 결정의 과정이 '교회리더십 분들'에 한정되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 그분들은 수많은 시간동안 숙고하여 결정을 내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숙고의 과정이 평신도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만의 리그'에 그쳤다는 것이 가장 큰 잘못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결정에 대해서 일일이 평신도들에게 동의를 구하기에는 절차상의 낭비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어떠한 행사라면 모를까, 이것은 교회자체를 옮기는 문제이고 이러한 옮기는 데에 있어서의 비용이 2500억원(1년 예산의 5배라고 알고는 있지만 확실치 않음)에 달하는 커다란 문제이니 만큼, 교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단순히 '교회 윗분들의 생각이 이러하니 너희들은 순종하고 따라라'라고 말할 상황이 아닌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 걱정스러운 마음에서 기도가 최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저 또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하신다는 마음을 강하게 주실 때라는 것에 대해서 너무 '불명확'하기 때문에 이대영님의 의견에 대해 이의가 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도 기도하면서 점점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해지므로, '반대하신다는 마음을 강하게 주신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으로, 이 이상 늦어질 수록 점점 돌이키기 어려운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이를테면,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상황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건너편의 병원을 놔두고 병원에 가야할지 기도를 하는 격과 큰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라고요? 교회가 우리은행에 부채를 차입한 상황에서 1년에도 몇억씩 이자가 불어난 여지가 있고, 방금 언급하였듯이 착공이 시작될 수록 더더욱이나 돌이키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한시가 급하다는 면에서 응급상황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욕을 먹어갈 각오를 하면서 건축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이유는, 어떠한 분열을 조장하거나 반항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간절하게' 이해부탁드립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그만큼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물론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에 대하여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임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건축의 문제에 대해서 맹목적으로 찬성/반대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에 대해서 저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는 것은 '현재 절차상에서 문제점이 많기'때문이지, 단순히 무조건 건축반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여, '평신도로서 납득할 만한 절차 하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 저도 쌍수 들고 찬성할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영상설교에 대해서는 저도 뭐라 비판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영상 설교 앞에서 제가 제 아무리 옥한흠 목사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해봤자 설득력이 없음은 자명한 일이고요. 그러나 저는 이번 달 Disciple지 11월호의 옥한흠 목사님 인터뷰 글인 "나의 교회론과 제자훈련은 엇박자가 된 것 같다"의 글을 읽어 보십사 하고 부탁드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의 옥한흠 목사님의 목회철학과 교회론은 이번 영상설교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대영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보다는 제자훈련을 통한 세상의 빛과 소금을 만들어내는 것을 핵심 가치로 두셨고, 이는 교회의 비대한 성장 하에서는 한계성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번 인터뷰 글은 그분의 철학에 일맥상통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반드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편의를 위하여 제가 딥링크를 걸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PDF로 변환하여 첨부하였으니, 인쇄해서 읽어보시면 더욱 보시기 편할 것입니다.
http://www.disciplen.com/disciple/article_view.asp?darcid=1748&page=1&p_no=1&s_no=1&thd_code=1101
그리고 마지막, 이대영님께서는 오정현 목사님께서 충분히 소통을 시도하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이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건축에 대하여 설교나 집회를 통하여 일방적으로 표하셨으며, 이에 대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일각에서는 공청횐가 뭔가의 '공개적인 절차'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이는 서초동 부지 선정 이전의 다른 곳에 대한 문제였고, 정작 선정 부지를 바꿔서 서초역 근처인 현재 확정 부지로 선정될 때에는 공개적인 절차 없이 일사천리로 착수했다는 의견을 접했습니다. 물론 제가 확인한 바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확신있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건축 부지 선정에 대하여 대학부나 청년부에게 어떠한 의견제시나 의견수렴의 절차를 거쳤느냐는 것입니다. 대예배때 잠깐잠깐 언급하다가 갑자기 100가지 기도문 배포하고 작정헌금 이야기하더니, 최근에 대학부+청년부+기드온 긁어모아서 건축 집회를 연 것이 오정현 목사님의 '소통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사용자 경험(UX)에 의한 효율성과
강력한 보안에 의한 안전성을 누려라!
윈도우 XP가 출시된 지 10년이 되어가고 있는 시점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는 2014년까지만 윈도우 XP에 대한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XP를 사용하는 동안 HDMI, 4GB 이상 메모리 등의 하드웨어는 발전되어 일반화되었고, iPod과 같은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고용량 USB 메모리 등은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윈도우 7은 이런 필수품들을 컴퓨터에서 300% 이상 활용하기에 적합한 최상의 운영체제이며, 앞으로 윈도우 XP 시대를 마감하고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OS 환경이다.
228개의 알찬 티켓, 필요할 때 골라 쓰자!
이 책은 윈도우 7의 기본 기능부터 활용까지 따라하기 방식의 사전 형태로 구성하였다. 총 250개의 티켓 중에서 필요한 기능을 사전처럼 찾아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또한 해당 기능을 각각의 운영체제 XP, Vista, Seven에서 지원하는지의 여부를 체크하여 어떠한 운영체제를 사용하더라도 쉽게 해당 기능을 사용하고 익힐 수 있다.



저자: 김명준
10년간 IT 업계에서 개발자로, 다양한 고객들에게 윈도우 운영체제에 대한 쉬운 사용 방법 등을 설명하는 컨설턴트로 일했다. 현재는 일본 ELECOM사에 입사하여 이어폰, 마우스 등의 라이프스타일 제품을 디자인하는 아트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MVP(Most Valuable Professional)로서 활동중이다.
주요 저서로 『따라해보세요! ASP로 멋진 홈페이지 만들기』, 『처음 배우는 윈도우 비스타 날개달기』 『익스프레션 WEB 2』가 있다. 블로그 _ http://www.lifehack.kr 메일 _ gboarder@naver.com

PART 01. 윈도우 7 시작하기
PART 02. 기본 기능과 인터페이스
PART 03. 윈도우 7의 바탕 화면
PART 04. 파일과 폴더 관리하기
PART 05. 인터넷 익스플로러 8 사용하기
PART 06. 멀티미디어 사용하기
PART 07. 업데이트와 보안
PART 08. 하드웨어 및 전원 관리하기
PART 09. 파티션 관리와 백업 관리하기
PART 10. 네트워크 구성과 홈 그룹
PART 11. 윈도우 XP 모드 사용하기

윈도우 7이 윈도우 XP와 비스타를 대체할 운영체제로 주목을 받으면서 사용자들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 책은 윈도우 7의 새로운 기능부터, 윈도우 XP에서부터 Seven으로 이어져 온 편리한 기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자세한 따라하기 예제를 통해 윈도우 7을 바로 알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필자는 윈도우 7의 다양해진 기능을 초기 베타 버전이 나올 때부터 하나하나 테스트하고 마스터하면서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또한 실생활이나 업무에서 필요한 실용적인 기능을 위주로 내용을 구성하였습니다.
또한 사전식 구성을 100% 활용할 수 있도록 상황별 활용 지침을 Intro에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XP를 사용하는 독자들도 책의 기능을 활용할 수 있도록 XP 상황에 맞게 기능을 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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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쓰는 최고의 검색포털 사이트를 묻는다면 대부분 Naver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검색엔진을 갖춘 사이트를 꼽는다면 인터넷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Google을 이야기할 것이다. Naver의 경우에는 지식in과 같은 콘텐츠들이 대량으로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정리된 정보를 사람들이 간단하게 찾을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만, 정작 산재된 정보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는 목적으로 검색을 할 때에는 Google이 훨씬 유용하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아니 외국에는 더욱이나, Google이 검색목적으로 많이 쓰이는 이유이다. 왜 Google은 그렇게 강력한 검색능력을 갖추게 되었을까?
적잖은 IT회사들이 그렇듯, Google또한도 최초의 사무실은 차고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창업자는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었으며, 모두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여 박사과정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한 엔지니어의 사고를 가진 그들은 모든 정보는 알고리즘으로 정리될 수 있으며 이 모든 정보들을 하나로 집대성할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어떻게 본다면 허무맹랑한 꿈을 가지고 검색엔진 사이트 운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았다. 이미 그 당시에는 Yahoo!나 AOL같은 쟁쟁한 검색포털 사이트들이 포진해 있었고, 막강한 자본력과 콘텐츠, 유료회원들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Google이 다른 회사들보다 뛰어난 무언가를 가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참여할 시장이 없을 것임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의 시작 초기에는 텍스트 광고를 이용하여 나름대로의 수익 창출을 꾀하였지만, 한정된 이용자 수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으리라고 했던가. 그 당시 Yahoo!는 검색로봇이 아닌, 편집자들을 고용해서 일일이 인터넷 사이트들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검색포털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웹의 성장속도가 사람의 분류속도보다 월등히 빨랐기 때문에, Yahoo!는 자신들의 능력이 닿지 않는 범위의 사이트들을 다른 회사의 검색 엔진을 외주하여 보완하는 방식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검색 엔진의 검색 능력은 다 고만고만했기 때문에 Yahoo!는 이들 엔진들을 정기적으로 교체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Google에게도 그러한 계약이 맺어진 것이다. Google의 검색엔진 초기에는 다른 회사들과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들의 검색방식인 알고리즘 검색은 입력되는 데이터가 많을수록 정교해지고 정확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특징과 한정된 방문객을 가지고 있던 Google에게 이 Yahoo!와의 계약은 가뭄에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Google은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데이터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훨씬 더 정교한 검색 알고리즘을 가지는데 바탕이 되었고 결국은 타 검색포털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Yahoo!는 2년 뒤에 뒤늦게 검색 엔진을 바꿨지만, 이미 Google이 자사 홈페이지만으로도 충분히 성장한 뒤였다. 그러한 알고리즘을 저장하는데 에는 하드위어가 필수였다. 다른 무수한 대기업 데이터저장소는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넓고 냉각이 잘 되었지만, 한정되고 초라한 Google의 자본력은 Google이 차고에서 시작하여 좁은 공간에 그다지 성능이 좋지 않은 하드웨어밖에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Google의 공동창업자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도사였다. 그들의 검색엔진 운영방식은 한정된 하드웨어에서도 최적의 성능을 낼 수 있었으며, 그 당시 닷컴열풍의 거품이 무너지던 시기여서 싸게 매각된 데이터 저장소들을 그야말로 거저먹을 기회가 맞물렸다. 그렇게 Google은 점차 대기업 못지않게 나름대로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Google은 자료의 집대성을 검색에만 한정짓지 않았다. 검색엔진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검색어를 넣는 사람의 필요를 알아야 했는데, 이는 대량의 방문객들이 입력한 검색어와 검색된 사이트에서 클릭된 경향을 바탕으로 수집될 수 있었다. 이렇게 Google의 자료 수집은 점차 사람들의 키워드에 따른 성향파악으로 확장되었고, 이는 개인정보를 입력해야지 검색서비스를 제공하여 광고수익을 얻는 타 검색포털과 차별화되었다. Google은 키워드만으로도 그들에게 구미를 당기게 하는 광고를 띄울 수 있었고, 이는 현란한 배너가 아니라 소박한 텍스트 광고로도 충분하였다. 더 나아가 Google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의 자료까지 확장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을 수집하여 인덱스를 구축하고 웹에서 검색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이전에 오픈 북 얼라이언스나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도 시도된 일이 있었지만, 워낙 저작권 업체와의 문제나 한정된 참여 단체의 영향으로 크나큰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다. Google은 주로 대학 기관과 협의하여 대학 도서관을 스캐닝하는 방식을 취하였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스캐닝을 하고자 고민하였다. 책의 저자는 아마도 Google이 스캐너가 아니라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 방식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자료는 텍스트나 그림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Google은 동영상에도 손을 대었다. 처음에 Google은 '쓸 만한' 동영상만을 올리길 고집하였고, 대개 TV프로그램이나 다큐 등의 동영상을 중심으로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검색 방식은 동영상 자막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콘텐츠의 한계가 컸고, 동영상 자막이 있는 동영상은 더욱이나 한정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YouTube가 있었다. YouTube또한 한정된 콘텐츠로 미미한 시작을 하였지만, 결국 추천 동영상을 원하는 이메일로 링크를 보내기 등등의 전략으로 점점 입소문이 나게 되었고, 동영상이 퍼지는 속도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고 Google은 이메일까지 손을 뻗었다. 이메일은 원래 검색포털의 전유물이었고, Google은 단지 검색만을 위한 사이트로 그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메일에 대해서도 검색의 개념을 도입한다면?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Google은 이메일 서비스 안에 검색창을 당당히 넣었고, 나중에 추가하였지만 이러한 검색기능 때문에 삭제 기능이 필요치 않다고 하여 삭제버튼을 일부러 넣지 않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Google이 당당할 수 있었던 점은, 타 포털사이트들은 이메일의 내용을 보면서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Google의 모든 자료수집방식은 컴퓨터를 이용한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람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적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그래도 의혹은 없어지지 않고 있다. 컴퓨터 네트워크 방식의 다음 세대는 중앙집중화 컴퓨터 방식이라고 한다. 이를 영어로 Cloud Computing이라고 하는데, Google은 이 개념에 따라 현재 각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는 Office를 온라인으로 옮겨버렸다. 이는 이전에도 시도된 바가 있었지만, Google 정도의 영향력 있는 기업이 본격적으로 실행하였고 급기야는 Microsoft의 영역을 직접적으로 건드렸다. Microsoft는 그 당시에도 Office 제품들을 각 컴퓨터에 판매하여 설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만약 Google의 온라인 Office 시스템이 대중화되기 시작한다면 Microsoft의 Office 판매량은 급감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온라인 Office의 기능적 한계가 많기 때문에 Microsoft의 입지가 뒤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시장에 영향이 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향후 네트워크 속도가 빨라진다면 온라인 Office의 기능이 더욱 막강해질 것이기 때문에 Microsoft에게 작지 않은 위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지리 정보를 담는다면 어떻게 될까? Google은 드디어 이 영역에도 마구(?)를 뻗쳤다. 사실, 위성사진을 통째로 온라인에 옮겨 담는 일은 미국 국방성이 유일하였다. 그러나 십 수 년 전부터 그러한 제한 이 풀리고 기업들이 위성을 쏘아 올리면서 온라인으로도 위성사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KeyHole이라는 벤처기업이었다.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사용자들이 컴퓨터로도 세계여행을 하는 것처럼 그러한 간접경험을 하도록 서비스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Google도 이 기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은 인수하여 협업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StreetView라는 서비스를 함으로써 길마다의 사진을 찍어서 사람들이 가보지 않은 지역에 대해서도 가 본 것처럼 상세히 정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Google은 이제껏 세상의 모든 자료의 2~3% 밖에 모으지 않고, 더 나은 하드위어로 집대성하는데 300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보았다. 단순한 먼 시간이 아니라 유의성 있는 계산을 통해서 내놓은 수치이겠지만, 예측치 못하는 컴퓨터의 발전 속도를 감안한다면 아마도 100년 이하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그 때까지 Google이 살아남는다면, 그 기업의 모토인 '모든 자료를 개방하여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게 한다.'는 결코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평소 Google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면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Google의 성장 마인드, 어떤 난관이 있었는지, 그리고 여기에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Google의 정보수집 방식에 대한 저작권 업체나 사생활 보호를 위한 사회단체와의 수많은 갈등들을 보면서 그래도 Google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조를 지키고 여기까지 이끌어왔다는 것에 대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이 책을 쓴 필자에 대해서도, 무슨 매니아가 쓴 것처럼, 처음부터 2008년까지의 과정들을 세세하고 군더더기 없게 잘 풀어놓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40쪽 가량 할애할 만큼 풍부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무엇보다도, Google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도 피하고자 중립적으로 쓰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서도 빼 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Google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많은 네티즌이나,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기업을 운영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 책이 그 사람을 위한 책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안녕하세요? 저는 대학4부 6학년 김동한입니다.
이번에 서임하신 분들의 탁훨한 '리더'십과 섬김을 경험하며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서임을 축하드리고 부디 리더 역할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깨닫는 귀중한 경험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섬김을 이번 텀 끝까지 유지하실 수 있도록 매번 기억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진혜정 리더님 이거 보면 안되는데 ㄲㄲㄲ )
오늘은 약간 민감한 주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지하철 상인 아닙니다)
흔히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전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종교가 있는 사람'이죠. 그러나 종교가 있는 사람보다 더더욱이나 전도하기 어려운 케이스가 바로 '무신론자'입니다. 무언가에게 의지한다는 면에서 비슷한 면을 가지는 타 종교인에 비해서 무신론자는 아예 전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 마음을 좁히기는 커녕, 소모적인 말싸움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불경(?)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가끔은 '진흙탕에 개싸움'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미묘한 갈등은 여러가지 매체에서도 양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Knowing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서 신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장면은, 우리가 신의 존재에 대하여 아무리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해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판단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기도 했습니다.
자....잡소리는 잠시 접고, 흔히 알려진 일화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얼마 전에 대학4부 주보에도 실리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여기에 올린 것은 그 뒤의 내용도 있음을 제목과 더불어 재차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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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자네는 크리스찬이지?
학생: 네, 교수님.
교수: 그래, 자네는 신을 믿는가?
학생: 물론입니다, 교수님.
교수: 신은 선한가?
학생: 그럼요.
교수: 신은 전능한가?
학생: 네.
교수: 내 동생은 신께 고쳐달라고 기도했지만 암으로 죽었네. 대개의 사람들은 누군가 아플 때 도와주려 하지. 하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네. 이런데도 신이 선한가? 음?
(학생은 침묵한다.)
교수: 대답을 못하는군. 그럼 다시 묻지, 젊은이. 신은 선한가?
학생: 네.
교수: 그럼 사탄은 선한가?
학생: 아닙니다.
교수: 사탄은 어디서 태어났지?
학생: …하나님에게서 …부터지요.
(하나님은 루시퍼라는 천사를 만드셨다, 후에 타락하여 사탄이 된…)
교수: 그렇다네. 그러면 말해보게, 세상에 악이 있는가?
학생: 네.
교수: 악은 어디에나 있지, 그렇지 아니한가? 그리고 신은 모든것을 만들었지. 맞는가?
학생: 네.
교수: 그렇다면 악은 누가 만들었는가?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세상에는 아픔, 부도덕, 추함 등의 추악한 것들이 존재하지, 그렇지?
학생: 그렇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나?
(학생은 대답하지 않는다.)
교수: 과학은 사람이 세상은 인지하는데 5가지 감각을 사용한다고 하지. 그렇다면 대답해보게 젊은이, 신을 본적이 있는가?
학생: 못 봤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학생: 아니오, 교수님.
교수: 그렇다면 신을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도 없는가? 신을 어떠한 감각으로도 인지한 적이 있는가?
학생: 아니오, 없습니다. 교수님.
교수: 그런데도 아직 신을 믿나?
학생: 네.
교수: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신이 없다고 말하네. 자네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학생: 저는 단지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교수: 그래, 믿음. 그게 과학이 가지지 못 한 것이지.
학생: 교수님, 세상에 열이란 것이 있습니까?
교수: 물론이지.
학생: 그러면 차가움이란 것도 있겠지요?
교수: 그렇다네.
학생: 아닙니다, 교수님. 그런 것은 없지요.
(강의실은 이 반전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학생: 교수님, 많은 열, 더 많은 열, 초열, 백열, 아니면 아주 적은 열이나 열의 부재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움이란 것은 없지요. 영하 273도의 열의 부재 상태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이하로 만들 수는 없지요. 차가움이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움이란 단어는 단지 열의 부재를 나타낼 뿐이지 그것을 계량할 수는 없지요. 열은 에너지이지만, 차가움은 열의 반대가 아닙니다. 교수님. 그저 열의 부재일뿐이지요.
(강의실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학생: 그렇다면 어둠은 어떻습니까, 교수님? 어둠이란 것이 존재하나요?
교수: 그렇지. 어둠이 없다면 밤이 도대체 왜 오는가?
학생: 그렇지 않습니다, 교수님. 어둠 역시 무엇인가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지요. 아주 적은 빛, 보통 빛, 밝은 빛, 눈부신 빛이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아무 빛도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어둠이란 것은 없지요. 만약 있다면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 수 있겠지요, 그럴 수 있나요?
교수: 그래, 요점이 뭔가, 젊은이?
학생: 교수님, 제 요점은 교수님이 잘못된 전제를 내리시고 있다는 겁니다.
교수: 잘못되었다고? 설명해 줄 수 있겠나?
학생: 교수님, 교수님은 이분법적인 오류를 범하고 계십니다.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이 있다는 논지이지요. 교수님은 하나님을 유한한, 우리가 측정 가능한 분이라 보고 계십니다.
교수님, 과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조차 설명을 못합니다. 전기와 자기를 말하지만, 볼 수는 없지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물론이구요. 죽음을 생명의 반대로 보는 건 죽음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무지해서 그런 겁니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부재일뿐이지요. 교수님은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고 가르치십니까?
교수: 자연 진화 과정을 말하는 거라면 그렇다네.
학생: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을 눈으로 목격한 적이 있습니까, 교수님?
(교수는 논리가 성립되어감을 보고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학생: 아무도 진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증명하지도 못했으니 교수님은 개인의 의견을 가르치시는 거 겠군요, 교수님. 마치 과학자가 아닌 연설가 처럼요.
(강의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학생: 이 강의실에 교수님의 뇌를 본 사람이 있나요?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 여기에 교수님의 뇌를 듣거나, 느끼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은 적이 있는 분에 계십니까? … 아무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과학은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논증으로 교수님의 뇌가 없다고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교수님의 강의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강의실은 고요했다. 교수는 심오한 표정으로 학생을 응시했다.)
교수: 사실을 믿는 수밖에 없겠군, 젊은이.
학생: 바로 그겁니다, 교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믿음" 입니다. 그게 바로 모든 것을 움직이고 생명 있게 만드는 것이지요.
(교수는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뒤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교수의 시선에 따라 학생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교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교수: 무슨 일인가?
사티레브: 저는 사티레브(Satirev)입니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죠.
교수: 그래, 왜 손을 들었는가?
사티레브: 저 돌아버린 학생과 그 학생을 인정하는 어떤 멍청한 남자 때문에 이 강의실을 나갈까 해서 말입니다.
(사티레브의 말에 교수와 학생은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을 향해 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수: 누구에 대한 불만인가. 나인가, 아니면 저 젊은이인가?
사티레브: 저 젋은이가 돌아버린 자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이렇게 버벅 거릴 줄은 몰랐습니다.
학생: 제가 말한 것에 문제가 있습니까?
사티레브: 문제가 없는 게 뭐냐고 묻는 게 더 빠를 듯하군.
(사티레브는 강의실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학생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숨을 쉬었다. 학생과 사티레브는 서로 마주보고 서있었다.)
사티레브: 자네는 전자기파에 대해서 언급했었지. 그럼 묻겠네, 자네는 분명 어떠한 감각기관으로도 신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지. 그리고 자네는 전자기와 신 모두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럼 자네는 어떻게 예시로 든 전자기파라는 것을 알고 논하는가? 전자기파도 믿는가? 퀄컴은 자네가 믿는 두 번째 신인가?
(사티레브의 말에 일각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학생: 오감으로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실재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려 한 것입니다.
사티레브: 말장난이네. 우리의 오감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우리는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걸 지각할 수 없다네. 고래의 초저주파, 박쥐의 초음파 등이 그러하지.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논하는 초저주파, 초음파는 모두 믿음의 결과물이겠네, 안 그런가?
(학생은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 우린 지각할 수 없는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기술을 개발시켜오고 있지. 들리지 않는 라디오 전파는 라디오 회로를 거쳐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뀐다네. 아, 자네는 라디오 전파도 믿는가? 어느 채널을 믿는가?
(강의실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티레브: 우린 자네가 지각 불가능하다고 내민 예시를 이미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지각하고 있지. 그래프로든 소리로든 간에.
(학생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신이 지각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건 괜찮은 접근이라네. 불가지론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과학으로도 관측되지 않는, 바로 그 절대자 말일세. 하지만 말이야, 과학으로 관측되지 않는 개체가 또 있다네.
학생: 천사 말입니까?
사티레브: 아니네. 바로 제우스라네.
(제우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말씀하십니까?
사티레브: 아니라네. 그리스 경전의 제우스를 말하네. 자네에겐 그것이 신화일지 모르겠지만, 유대민족들이 믿던 신화에 비하면 그리스 경전은 더욱 감성적이고 인간적이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예수의 희생도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야훼는 태초부터 존재하여 인간 세상에 오지랖이란 오지랖을 다 떨지만 제우스는 타이탄 신들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낸 개척자라네. 자네가 소위 성경이라 부르는 기독경은 제우스가 세상에 내린 두 번째 판도라의 상자라네. 그걸 연 자네는 그의 함정에 빠진 거라네.
학생: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집필자가 밝혀져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사티레브: 느낄 수 없다는 게 바로 판도라의 상자라는 증거라네. 교묘한 함정은 토끼가 전혀 느낄 수 없게 짜여있다네.
학생: 기존의 상식을 깨는 주장이군요.
사티레브: 반증이 가능한가? 나는 제우스와 믿음으로 관계하고 있다네.
(학생은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판 논리의 함정에 빠졌음을 안 그는 당혹감을 느꼈다.)
사티레브: 그리고 제우스는 자네 같은 크리스찬들을 전부 타르타로스에 넣을 것이라 하였네. 가짜 신을 믿는다는 이유로.
학생: 그런 구절은 그리스 신… 경전에 없을 텐데요.
사티레브: 나와 제우스는 책이 아닌 믿음으로 관계한다네. 자네들이 성령이라 부르는, 그런 것과 비슷한 개념이 나에게 진리를 속삭인다네. 다만 나에게 온 성령은 자네의 성령과는 이름이 다르다네. 그리스령이라고 하지.
교수: 성령이라는 걸 자네가 입증할 수 있나?
사티레브: 자기 머리에 뇌가 있는지도 장담 못하는 교수님이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그리스령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교수님은 X레이나 MRI로 머리를 찍어본다면, 인화된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하루에 5번씩 기도하겠죠?
(교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나왔으나 교수가 그쪽을 바라보자 웃음소리가 멈췄다.)
사티레브: 장난은 그만하도록 하지. 제우스 하나에 쩔쩔매는 주제에 시바(Shiva),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 등은 어떻게 상대할 건가. 자네가 펴는 그 알량한 논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적용될 수 있다네. 심지어 야훼를 뜯어먹는 전설의 코요테를 생각해볼 수 있겠네.
학생: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사티레브: 자네들이 소위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게 대하는 태도에 비하면 아주 신사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지옥이니 심판이니 하며.
학생: 좋습니다. 제 논리가 악용될 여지가 있음은 인정합니다만, 논리 자체에서는 모순점을 찾지 못하신 것 같군요.
(사티레브는 크게 웃었다.)
사티레브: 지금, 자네는 자네의 논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좋아, 그럼 자네가 언급한 걸 이야기해보지. 자네는 진화를 부정하는 것 같던데, 아닌가?
학생: 창조를 전 믿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 누구도 진화하는 과정을 본 적 없으며, 그건 단순히 이론에 불과합니다.
사티레브: 단순히 이론? 허… 자네가 진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화하는 과정이 관측되지 않아서겠네, 자네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화석이 있지 않은가?
학생: 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에 화석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미싱링크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학생의 말에 사티레브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실 왼쪽의 학생들도 입에 웃음을 머금고 상황을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자네는 내가 아기에서 지금의 성인의 몸으로 성장했다고 보는가?
학생: 그렇습니다.
사티레브: 자네가 내 성장과정을 관찰했나?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랬을 수도 있지 않은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수는 민망함을 느끼고 등을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학생: 사진이 있을 것 아닙니까?
사티레브: 물론이라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사진이 있지. 나머지 사진들은 애석하게도 집에 화재가 일어나서 잃었다네. 하지만 나의 성장을 말하기엔 사진이 턱없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 많은 화석도 충분치 않은 자네가 5장 밖에 안 되는 내 사진으로 나의 성장을 장담할 수 있겠나. 물론 내 사진이 백 장 넘게 있다고 해도, 자네에겐 하염없이 부족하겠지. 미싱링크라는 말, 들어봤나?
학생: 사티레브 씨에게 미싱링크가 있단 말입니까?
사티레브: 그렇다네. 난 태어나자마자 제니퍼 로페즈의 몸으로 살았다네. 그러다가 헤라 여신의 시샘으로 인해 지금의 평범한 몸이 되어버렸지.
(학생은 할 말이 없었다. 사티레브의 말장난이 주는 당황스러움과 그게 자신의 말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 그는 땀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티레브: 당황스러울 거네. 난 자네의 논리를 하나하나 반박해야 할 의무감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네.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난 제우스를 숭배하며 번개 걱정 없이 비오는 거리를 걸을 수 있고 남들에게 제니퍼 로페즈 시절을 자랑할 수 있지. 자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망상을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버렸네.
학생: …
사티레브: 진화론은 양상이라네. 태초의 생명체를 설명하는 게 진화론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네. 함수로 보자면, x값이 0일 때의 y값을 찾는 게 진화론이라는 학문이 아니네. 우린 x값에 따른 y값의 변화 양상을 진화라 명명하고 그걸 연구할 뿐이네. 화석이 부족해서 진화론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네는 수천 개의 점을 구해놓고도 그래프 하나 못 그리는 순수한 중학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라네.
(학생은 잠깐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학생: 그러면 열, 빛에 관한 제 의견도 문제가 있습니까?
사티레브: 당연하지. 선한 신, 악한 신에 대한 것 말인가? 자네는 열과 차가움, 빛과 어둠의 예시를 통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저 교수를 눌러보려 했지. 하지만 선과 악은 분명 따로 존재한다네. 선이 약하면 악이 되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세.
학생: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티레브: 애초에 이해를 했다면 그런 멍청한 발언은 꺼내지도 않았겠지. 예를 들어봄세. 자네가 빅맥을 먹고 싶은 데 50센트가 부족하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자네에게 50센트를 준다면, 나는 선한가?
학생: 선합니다.
사티레브: 그럼 내가 자네에게 1센트를 준다면?
학생: 마찬가지로 선합니다.
사티레브: 내가 한 푼도 주지 않는다면?
(학생은 망설였다.)
사티레브: 선하지 않지. 그러나 이게 악한 건 아니라네. 내가 자네의 1센트를 뺏는다면, 그건 악한 행동이겠지. 열의 부재가 차가움이라고 했지만, 선의 부재는 악이 아니라네. 선도 악도 아닌 그 중간적인 것이 자네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세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자네에게 50센트를 주지도, 빼앗지도 않는 자들이 지천에 널려있다네. 이런데도 선의 부재를 악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있는가?
(학생들은 사티레브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교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사티레브: 정리하지. 자네는 선과 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여 다시는 나와 볼 일 없을 저 교수를 함정에 빠뜨렸고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이해 부족을 관측의 부족으로 보는 오만한 발언을 했다네. 신이 오감으로 지각되지 않는 대상이라며 이미 상식으로 인지하고 있는 전자기파를 예시로 들고 나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야,
(사티레브는 학생 앞으로 걸어갔다. 학생은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티레브: 거증책임은 자네에게 있다네. 신이 있냐고 질문한 건 교수라네. 그럼 자네는 교수가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에 상관없이 신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어야 하네. 결국 자네가 말한 것들 중 신이 있다는 증거 또는 논리를 내포한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자네는 고작 교수의 말에 말도 안 되는 답을 해놓고서 결국엔 믿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자네는 신이 있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은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을 밝힌 꼴이 되었지.
(학생은 답을 하지 못했다.)
사티레브: 천하의 교수가 저 정도인데, 갓 유치원에 입학한, 또는 갓 중-고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얼마나 자네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겠는가. 허나 언제나 그러하듯 자네들의 말은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네. 자,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를 어디서 끌어올 건가?
학생: 성경이 있습니다.
사티레브: 자네, 아까 그리스 경전의 그리스령이 한 말을 잊었나? 판도라의 상자라니까. 반증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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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드는 생각은 아마도 'ㅅㅂ 이놈들 말빨로 먹고사나.'겠죠 ㅋㅋㅋㅋ
사회에 나가서나, 심지어는 '목사님'들도 최소한의 말빨 없이는 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감안할 때, '말빨 좋다는 것'에 대하여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빨없는 저같은 우민으로서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군요.
뭐.....눈치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saritev가 나온 파트부터가 우리가 흔히 보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처음부터 있었던 부분을 기독교적 생각을 가지신 분이 앞부분만 따서 퍼뜨리셨거나, 원래 존재했던 앞부분에서 뒷부분이 추가된 걸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저 'saritev'의 의미를 감안할 때, 뒷부분을 추가하신 분은 무신론자이거나 신이 있다 하더라도 기존 종교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겠네요.
사실, 이 글을 올릴 때에는, 이런 파트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뭐, 아예 이 에피소드를 모르고 있다면 모를까, 많은 사람들에게 일부만 알려진 내용이 알려진 것이라면, 다른 측면의 내용도 알려야 할 이유는 충분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학부 행정팀에서 '대학주보 공간상의 문제'로 생략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참에 이공간을 빌어서, 3학년 행정팀 분들 ㅅㄱ하셨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점점 드는 생각은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무신론자에 대하여 대화를 할 때 어떻게 접근하는가에 가까워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특히 창조론과 진화론의 싸움에서, 무신론적인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개는 '이러이러니까 이것이 맞다.' '웃기네, 아니다. 저러저러니까 저것이 맞다.'의 양상이 보여지며, 나중에 가서는 적나라하게, '이것이 맞다.' '어디 증명해봐? 못하겠지? 그니까 저것이 맞어'하는 유치짬뽕발랄한 말싸움/말장난까지 이어집니다.
교회에서는 안 그렇다고요?
예를 들어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 미끼를 던지면 각자의 상상력이 동원되어서 별의별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교인에 한해서 의견차이 벌어진 케이스는 제가 구글링 실력이 딸려서 못하겠고, 생각해 보니 본 리더 클럽 [OB]카테고리 -> [글]게시판에 'UFO'라고 검색어치면 나오는 게시물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서 명수옵하가 질문을 올린게 있습니다. 역시나 탁월하신 다른 리더분들은 '성경의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라고 마무리지었습니다.
이 논리는 여기에서도 그대로 통용됩니다.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나, 진화론이나 창조론이나 어떠한 것도, 사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뿐더러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신이 존재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두가지 전제에 대한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제 아무리 간증을 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간증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들은 '과대해석이다.', '결국 삶의 실패에 대한 도피처를 신으로 삼는거 아니냐?', '우연의 일치' 등등의 태도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또한, 성경의 이적에 대해서는 '신화 또는 과장', 방언에 대해서는 '이슬람도 있던데?', 기도의 응답에 대해서는 '우연의 일치' '결국 불응답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보다 하고 체념하려는 거 아냐? 그게 현실 순응이 아니고 뭔데?' 하고 응대하는 경우가 많지요.
한마디로, 인간의 설득으로 이런 말들은 어지간한 '마음 약한 무신론자들이나 귀하게(?) 자란 분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게 대부분입니다.
졸려요...그냥 빨리 마무리 지을래요 =ㅅ=)a;;
일화 뒷부분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기독교 혹은 종교계 전체에 대하여 '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부정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여기에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신이 있다는 증거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 어느 정도의 말빨로 '믿음'이라는 요소를 도입시켰지만, 사실 이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되지 못합니다. 이런 면에서 'saritev'가 잘 지적했지요. 사실 이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요소이거든요.
(그리고 이러한 사이비 종교들이 유지할 수 있는 핵심 원인 중 하나는 인간의 '인지부조화' 경향에 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믿음을 잘못 이야기했다가는 그들의 눈에는 사이비 종교들과 별 차이점을 찾지 못하게 될지도 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교계에서 강력한 비판을 받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와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도 이분이 쓴 '이기적 유전자' '확장된 표현형' '만들어진 신'을 실험실 책꽂이에 꽂아넣고 읽지는 못하고 있는데, 대충 들은 이야기를 보면 '이분은 신이 있다는 것에서 과학이 증명을 못하고 영역이 다르다고 할 뿐이지, 신이 없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주류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은 적절한 reference와 함께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ㅈㄱㅅ, 이러다 글이 또 안끝나겠군요.
바로 결론 들어갑니다.
1. 신의 존재 유무는 불완전한 인간의 인지능력으로 증명 불가능하다.
2. 그러므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입장 차이는 존재할 수 있으나, 각 입장에 대한 반론 제기는 불가능하다.
3. [가장 중요]그러므로 불필요한 말싸움은 삼가자.
예상 질문
Q. 그럼 전도하지 말라는거야?
A. 아뇨, 단지 인간의 힘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기독교에서 '예수님' '기도'와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교만'인 것 같습니다. 그럴 만 하겠군요, 하긴.)
그 분에게 예수님의 일하심을 전하는 선에서 노력하시고, 그 사람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움직여주시길 맡겨드리면 됩니다.
Q. 그럼 걔네는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대?? 그런 생각머리로????
A. 대부분의 경우는 '의심하다 지쳐서입니다.'
성경, 까놓고 따지고 보면 별 희한한 얘기들이 많지요. 오히려 새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등반할 때 제가 '너 이런거 믿겨지냐?' 하며 농담조로 물어보고는 합니다. 제가 봐도 이런걸 단박에 믿는 분들이 신기합니다. (솔직히 말해서.....부럽죠) 심지어는 제자반에 들어가면서도 이러한 물음표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왔다갔다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혼자 생각하자니 미치겠고, 주윗사람한테 이야기하자니 기껏 제자반씩이나 왔는데 이런거 물어보기는 부끄럽죠. 사실 저도 이런 고민 때문에 고2때 교회를 때려친 케이스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한 케이스는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그냥 아무 생각/의심 말고 '믿거나', 혹은 정말 아니다 생각하며 '때려치거나' 이렇게요.
믿는 경우는 개인의 결심도 있겠지만, 적지 않은 경우는 어쩌다가 어이없는 사건으로 믿는 경우도 있습니다. 왕년에 골때리는 무신론자이자 머리 오지게 잘 굴리시는 우리 'C.S. 루이스' 형님도 오죽했으면 자신의 회심서 제목을 '예기치 않은 기쁨'이라고 지었겠어요? 그 책을 잔뜩 기대하면서 봤는데, 몇가지 복선이 나오다가 책을 읽었던가 하며 갑자기 감동이 복받혀서 회심하더군요. 그때 얼마나 허무했던지;;;
Q. 무신론자는 그렇다 치고 다른 종교는?
A. 대부분의 경우에는 '현자의 가르침에서 신격화'되거나 '무속신앙에서 발전'된 케이스가 주된 분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불교, 유교 등이 있을 것이고, 후자는 이슬람 정도가 생각나네요.
[이 부분은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확실한 검증을 거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씨부린 것이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각자 알아보셔서 무지몽매한 필자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 '삶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걸 나중에 정치적 목적이든 중생들의 원에 의해서든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합니다. 불교에서 미륵불 등이 그러한 개념으로 알고 있습니다. 유교도 모두들 아시다시피 공자의 가르침에서 나왔는데, 그게 제자들에 의하여 그를 기리기 시작했고, 국가의 입장에서도 이 교리가 백성 부려먹기(?) 편하니 적극 장려하고 종교화한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의 경우에는 '무함마드'가 초승달이 뜬 밤에 계시 받고 꾸란을 쓴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은 유대교가 쓰는 구약성서와 아라비아 무속신앙의 짬뽕 + 무함마드 어록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정통성/정치적 영향력을 살리기 위해서는 유대교와의 네트워크가 필요했는데 그러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유대교의 경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꾸란 초기에는 유대인들도 천국갈 수 있다는 식으로 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자신의 국가의 영향력이 커지며 자립이 가능해지면서, 꾸란의 후반부는 '무조건 알라만이 유일한 신이다'라고 어조가 강하게 바뀌며 유대인을 배격합니다. 재미있게도, '알라'는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더 많은 이해를 가지기 위해서는 '비교종교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평신도 따위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교회/신학교가 외국의 교회에 비하여 약한 점 중 하나가 '이성적 고찰의 신앙'과 더불어 '비교종교학적인 이해'로 알고 있습니다. 남의 종교가 어떤지 알아야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더욱 제대로 믿죠.
ps. 얼마든지 비판/격려/질타/응원 가리지 않고 받습니다. 자고로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당뇨도 안생기고 건강해지죠. 근데 이유없는 비난은 받지 않겠습니다. 하긴 그렇다고 댓글 달리는거 막지는 못하겠군요. ㄲㄲ
ps2. 분명한 것은, 저 익명의 '학생'은 교수로부터 A+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입니다. F나 면하면 다행이겠네요.
ps3. 'saritev'는 'veritas'를 역순으로 만든 단어로서, '진리'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진리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지요.
ps4. 다다음날 시험 두개 있는데 또 이런 글 봐가지고 잡생각들어서 야밤에 이 ㅈㄹ해버렸네요 ㅋㅋㅋ.

Einstein.
아인슈타인은 뉴턴과 갈릴레오와 함께 우주를 이해하는데 그
개념을 뒤흔든 위대한 과학자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중력을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창시자였다. 또한 부전주의와 자유주의의의 대변자였으며 세계 평화의 '원로'였다

Bob Dylan.
미네소타의 Duluth에서
태어난 포크 송 가수 겸 작사작곡가. 예명은 시인 Dylan
Thomas에서 따왔으며 1960년대에 이르러 유명해졌다.
Woody Guthriey를 계승했으나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의식을 선보였다. 그의 노래와 가사는 동시대의 음악과 문화에 대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Martin Luther
King.
목사이자 흑인 공민권 운동가로 조지아의 Atlanta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흑인 공민권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비협력, 비폭력을 통한 소극적 저항 정책과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던 뛰어난 웅변술로
널리 알려져있다. 1964년 케네디 평화상과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Richard
Branson.
Richard Branson 은 Virgin
Records와 Virgin Atlantic Airlinse의 창립자이자 최고 경영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유명한 혁신가였으나 아직은 위인전기에 실리지 않았다. ;-)

John Lennon
and Yoko Ono.
그들은 새로운 평화적인 저항의 형태를 창출했다. 그들은 인터뷰하거나 출연할 때 항상 침대에 있었으며 'The Plastic
Ono Band'의 이름하에 녹음된 싱글, 'Give Peace a Chance (1969)'는
평화주의자들의 성가가 되었다.

Buckminster
Fuller.
그는 'Dymaxion'
('dynamic and maximum efficiency'; 동적 최대 효율) 집(1927) 을 개발했고 Dymaxion 다중 방향성 유선형 자동차(1932)를 만들었다. 그는 측지적 돔 또한 개발했으며 그의 많은
저서들은 Nine Chains to the Moon (1938) 과
Critical Path (1981)를 포함한다.

Thomas Alva
Edison.
에디슨은 1876년
연구를 위해 공장제 수공업을 그만두고 축음기 (1876), 탄소 필라멘트 전구 (1879), 활동 사진 설비를 발명했다. 그는 1883년 전기 밸브의 근간이 되는 '열이온 방출 현상'을 발견하였다. 그는 합해서
1000개가 넘는 발명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Muhammad Ali.
1967년, 종교에따른
징병거부로 타이틀을 뺏기고 링에 출입이 금지됐으나 문제를 대법원에 가져갔고 1970년 권투면허를 되찾았다. 현란한 복싱 스타일은 그를 전설로 만들었으며 슬로건인 "나는
최고다."는 캐치프래이즈가 됐다. 알리는 1980년 올림픽 불참을 선언한 아프리카 나라들을 설득시키기 위한 카터 대통령의 특사였다.

Ted Turner.
US 텔레비전 뉴스 매각인. 그는 1960년대에 아틀란타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 방송국을 사들이고
위성과 케이블 기술을 이용해 수퍼스테이션 WTBS로 성장시켰다.
1980년 24시간 뉴스 방송을 위해 케이블 뉴스 네트웍
(CNN)을 세웠다.

Maria Callas.
오페라 소프라노. 아테네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47년 La Gioconda의 Verona에서 출현해 즉각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녀는 대부분의
엄격한 소프라노의 역할에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노래했으며 베르디 전 이탈리아 오페라의 벨칸토 스타일에 뛰어났다.

Gandhi.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 간디는 일생동안 민족의 스승이자 인도를 계급사회와 물질주의로부터 해방시킨 개혁자, 그리고 인도의 자치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 애국자로서 추앙받았다. 그의
평화에 대한 가르침은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아시아의 평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받는다.

Amelia
Earhart.
캔사스의 Atchison에서
태어난 여류 비행사. 그녀는 대서양을 횡단한 최초의 여자 승객이었으며
1932년 단독 비행으로 같은 일을 해냈다. 1935년 혼자 하와이에서 캘리포니아로 비행했으며 1937년 세계 일주를 시작했으나 태평양 상공에서 실종되었다.

Alfred
Hitchcock.
런던에서 태어난 영화감독.
그는 런던에서 공학을 공부했으며 1920년 하급 기술자로 영화를 시작했다. 1925년 첫 작품을 감독했으며 이 후 넘을 수 없는 서스펜스의 대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복잡한 플롯과 신선한 카메라 테크닉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Martha
Graham.
그녀는 미국의 현대 무용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주의자였다. 그녀의 작품은 Appalachian Spring (1944)과 같은
개척자의 삶, Clytemnestra (1958)와 같은 그리스 신화,
그리고 심리극 등을 다뤘다. 그녀의 무용 교육법은 무용 전문 학교에 널리 수용되었다.

Jim Henson.
그의 'Muppets
(Marionettes/puppets)'는 "샘과 친구들"이라는 5분 방송에 처음 등장했으며 이 후Sesame Street(1969)에서 크게 유명해졌다. 개구리 Kermit, 미스 Piggy와 친구들은 The Muppet Show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100여개국 235백만명의 시청자들에게 방영됐다. 연작 영화물도 제작됐으며 음반은 Grammy상을 수상했다.

Frank Lloyd
Wright.
오픈 플랜의 혁신가로서 현대 건축을 이끌었던 디자이너라
여겨지며 자연물의 특징과 조화를 이루는 설계를 했다. 동경의 임페리얼 호텔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도
그의 수많은 작품 중 하나이다.

Pablo
Picasso.
그는 50,000점이
넘는 작품을 창작했고 만년(1966~73)에 347점의 무제
판화를 포함한 중요한 세 드로잉 시리즈를 제작했다. 90살 생일을 기념해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자리에 작품 8점을
전시했다. 20세기 초에 가장 유력한 미술가이고 모든 위대한 혁신가의 위에 서있다.
from '남상''s blog
from http://www.sleepingcat.com/other/thinkdiffer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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